• 온바오 2024-05-10
  • 언어선택
김동삼 생가
+
1234
    현지어
  • 김동삼 생가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1리 278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202.1km
김동삼 생가(대통합을 꿈꾼 독립운동가 김동삼) ... "이런 일정한 자리에서 죽게 되는 것도 과분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독립군이라면 대개 풀밭이나 산 가운데서 남들이 어데서 죽었는지도 알 수 없이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네가 원래 그런 죽음을 소망하였던 바인데 오늘날 이런 곳에서 죽게 되는 것은 유한으로도 생각된다. 죽기 전에 여러 친구들을 만나서 부탁할 말이 몇 가지 있지마는 어찌 마음대로 되겠느냐."



김동삼은 하얼빈의 일본총영사관에 체포되었다가 신의주지방법원의 검사국으로 옮겨져 취조심문과 예심을 받았고 공소를 제기하여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안 그의 몸은 쇠약해지고 병이 들었으나 그의 의지와 기개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1934년 1월 초부터 김동삼은 늑막염으로 병감에 수용되어 신음하고 있었다. 그가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하얼빈에서 맏아들 김정묵이 달려왔다. 김동삼은 걱정하며 먼 거리를 달려온 아들이게 위와 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독립운동가로서 감옥에서 최후를 맞는 것은 ‘과분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만주 벌판 이름 모를 곳에서 얼마나 많은 독립군들이 희생되었던가. 김동삼은 새삼 그들의 최후를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말을 듣는 아들은 안타까울 뿐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김동삼(金東三, 1878~1937)은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협동학교와 신민회, 대동청년단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으며,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1년 삼원보(三源浦)에 정착한 김동삼은 경학사 사장 이상룡(李相龍)을 도와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1914년에는 백서농장(白西農庄)의 장주가 되었으며, 1919년 서로군정서 참모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6월, 간도참변으로 무너진 동포사회와 독립군을 추슬러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주도하고, 통군부(統軍府)를 탄생시켰다. 8월 30일 통군부가 통의부(統義府)로 확대 개편되자, 총장이 되어 이를 이끌었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힘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그 뒤 정의부와 민족 유일당운동촉성회를 이끌며,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에 힘을 기울였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북만주에서 활동을 모색하던 김동삼은 1931년 10월 하얼빈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10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7년 4월 13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만해 한용운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지냈다. 그의 유언대로 화장하여 한강에 그 유해를 뿌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주변뉴스
< 1/2 >
주변포토
< 1/2 >
동종 정보 [내위치에서 202.1km]
실시간 관심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