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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봉 의거지(옛 밀양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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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최수봉 의거지(옛 밀양경찰서)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경남 밀양시 내일동 내일동 583-1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279.1km
“그들의 생활은 밝음과 어둠이 기묘하게 혼합된 것이다.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마음껏 즐기려했던 것이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이었다. … 사진 찍기를 아주 좋아했으며, 언제나 이번이 마지막으로 찍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 글은 항상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살아가던 의열단원을 묘사한 글이다. 밀양경찰서 투탄의거는 의열단에 의한 최초의 투탄의거로 의열단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의거이다. 1920년 12월 27일 오전 9시 30분 밀양경찰서장 와타나베가 경찰서원 19명을 모아놓고 훈시를 하고 있을때 최수봉은 폭탄 2개를 투탄하였다. 첫 번째 폭탄은 불발이었고, 두 번째 폭탄은 폭발했으나 성능이 좋지 못해 큰 피해는 주지 못했다. 그는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제 경찰의 추격을 받다가 스스로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상처만 입고 체포되었다. 최수봉은 1921년 2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으나 담당검사의 공소로 4월 1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에 상고하였지만 1921년 5월 2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대구 감옥에 수감된 최수봉은 1921년 7월 8일 오후 3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1894년 경남 밀양군 상남면에서 태어난 최수봉은 사립 동화학교를 다니면서 교장 전홍표의 강렬한 조국애와 항일의식에 영향을 받았고 동화학교 강제 폐교 후에는 동래 범어사의 명정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1913년 평양의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다시 3년간 수학한 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서간도로 가서 안둥〔安東〕과 펑텐〔奉天〕 사이를 오가며 활동하다 귀국하여, 광산노동·우편집배 등에 종사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1920년 11월 최수봉은 밀양에서 옛 친우 김상윤과 동행인 이종암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의 방법을 논하다 폭탄 투척으로 밀양경찰서를 파괴하기로 합의하였다.

한편 조선의열단은 1919년 11월에 만주 지린성〔吉林省〕 파로문에서 김원봉, 윤세주 등 13인이 조직하였다. 의열단이라는 명칭은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 의미를을 담고 있다. 이들은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단 한명도 배신하지 않았다.

의열단은 일제의 요인 암살과 식민 통치 기관 파괴를 목적으로 소수 정예의 대원으로 구성되었다. 조직 형태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으며 매우 엄격한 행동 지침을 가진 단체였다. 조직된 지 얼마 후 의열단은 베이징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각지에서 단원을 포섭하여 1925년경에는 70명의 결사 대원을 확보한 단체로 성장하였다.

의열단은 일제에게 위협과 공포의 대상이 될 정도로 많은 의거를 일으켰다. 1920년에는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 투탄 의거를 일으켰고, 이듬해에는 김익상의 총독부 투탄 의거가 있었다. 1923년에는 김상옥의 종로 경찰서, 김지섭의 일본 황궁 투탄 의거가가 있었다. 1926년에는 나석주가 한국 경제 침탈의 본거인 동양 척식 주식 회사와 식산 은행에 투탄하고 총격전을 벌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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