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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창신학교 터 신사참배거부운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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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옛 창신학교 터 신사참배거부운동지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경남 마산시 회원1동 회원동 415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296.8km
옛 창신학교 터 신사참배거부운동지(마산지역 항일운동의 거점)
"여러분들은 4년 전 이 학교에 입학하여 … . 앞으로 이 사회에 나가서 살 때에 학교에서 배운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갖고서 …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다하여 줄 것을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나라를 잃어버린 가련하고도 비참한 백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른 민족에 의해 지배를 당하고 그 명령에 복종하며 살아야 하는 슬픈 민족이 되었습니다. 왜 우리가 나라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겼습니까? 내 나라 내 강토를 왜 남에게 빼앗겼느냐 말입니다. 힘이 없었기 때문이요, 남에게 의지하려고만 하고 스스로 일어서려는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력한 탓이요, 민족 자주의 정신이 없었던 탓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학교에서 배운 나라 사랑하는 정신과 여러 가지 지식의 토대 위에 더욱 힘을 길러서 빼앗긴 나라를 도로 찾고, 우둔한 이 백성들에게 자주적인 민족정기를 불어넣어 주는 참된 민족의 지도자들이 되어주기 바랍니다."



이 글은 1911년 3월 22일 사립 창신학교 초등과 1회 졸업식에서 졸업생을 위한 손안로 교장의 격려사이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소위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세력 확대를 위해 전력을 가다듬고 각종 행사가 있을 때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37년 12월 17일 중국 난징[南京] 함락 보도가 전해지자 군국주의자들은 일본군의 사기를 돋운다 하여 야간의 제등행렬을 강요한 일이 있었다. 여기에는 마산 시내의 모든 학교와 관공서가 참가했는데, 구마산에서 출발한 행렬은 신마산 신사 입구까지 일렬로 대기하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창신학교는 차례가 되었으나 참배를 하지 않고 지나쳤다. 이에 일본 경찰은 교사들을 모두 경찰서로 연행하고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이후로도 창신학교는 동방요배, 일장기 경례, 신사참배, 교육칙어 암송 등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줄기차게 거부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던 전국의 기독교계 학교는 1936년경부터 신입생 모집중지, 폐교압력 등 일제의 교육탄압 수순대로 속속 폐교되었는데, 1939년 1월 창신학교는 조선 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신입생 모집을 금지한다는 공문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당국이 내린 신입생 모집금지 조치로 더 이상 학교를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폐교를 위한 행정상의 절차를 밟지 않을 수 없었다. 1939년 7월 14일 전교생과 모든 교원이 모인 가운데 폐교식이 진행되었다. 개교 이후 3·1운동을 비롯한 마산지역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창신학교는 32년 만에 교문을 닫았다.

창신학교는 1908년 상남동에서 개교하였다. 1924년에는 회원동 교사로 이전하였다. 1939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뒤에는 1948년에는 초급중학교로 재설립되었고, 1951년 농업고등학교로 개교한 고등학교가 1960년에 인문계 창신고등학교로 바뀌었다. 1990년에 현 봉암동 교사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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