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9
  • 언어선택
신익희 생가
+
1234
    현지어
  • 신익희 생가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경기 광주시 초월읍 서하리 160-1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32.5km
내 그 때 생각으로는 내 평생에 조국광복을 보려니 생각 못하였고, 내 목이 다할 때까지 독립운동을 하다가 중원 천지에서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되면 내아들·손자에게 유언하여 독립운동을 계속 시킬 심산 뿐이었다. 따라서, 어머님 유골을 매장하였다가 ······ 차라리 강물에 뿌려 유해라도 고국의 바다 기슭에 안착하여 꿈에 그리던 조국의 품안에 돌아가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임시정부의 진로가 그다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하자 신익희는 중국측과 연계하여 일제를 쳐부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리하여 상하이를 떠나 한·중합작을 위해 장개석과 환담을 하고 중국의 한커우[韓口]·난창[南昌]·창사[長沙] 등지를 순방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중·일전쟁의 여파로 인하여 한·중합작은 여의치도 않았고, 노모(老母)의 상(喪)을 당하는 등 독립운동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신익희는 그의 회포를 이와 같이 표현했던 것이다.

신익희(申翼熙, 1894~1956)는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1910년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政經學部)에 입학했다. 유학중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해 총무·회장 등을 지내면서 학생운동을 벌이고, 기관지로『학지광(學之光)』을 발간했다.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1918년 말부터 최린, 송진우 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했으며,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해외와의 연락업무를 맡았으며, 그 해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를 갖고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하는 등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에 기여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차장, 외무차장, 국무원비서장, 법무총장, 외무총장, 문교부장 등을 지냈다. 내무부장 재임 중 8·15해방을 맞이해 귀국하였다.
주변뉴스
< 1/2 >
주변포토
< 1/2 >
동종 정보 [내위치에서 32.5km]
실시간 관심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