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9
  • 언어선택
조소앙 형제 집터
+
1234
    현지어
  • 조소앙 형제 집터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경기 양주시 남면 양연로231번길 41-12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41.2km
조소앙(1887~1958)의 본명은 용은(鏞殷)으로 소앙(素昻)은 호이다. 1887년에 태어난 조소앙은 1904년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유학 중이던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동료 유학생들과 우에노공원에서 매국노들의 행위 규탄 대회를 열었다. 1912년 귀국하여 이듬해 상하이로 망명한 조소앙은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안중근·이회영 등이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무력투쟁을 택했다면 조소앙은 이론과 사상으로 민족운동을 선도한 인물이었다. 그는 신규식·박은식·홍명희 등과 함께 독립운동단체를 만들고, 1917년 7월 상하이에서 임시 정부를 조직하자는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하였다.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 대회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의제로 제출하여 국제기구에서 논의되는 성과도 거두었다. 1918년에 각 지역 독립운동가 39명의 동의와 서명을 얻어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도 조소앙이었는데, 이 선언서는 일본에 대한 독립군의 혈전을 선포하여 독립전쟁노선을 지향하였다. 이후 조소앙은 임시 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 헌장’과 ‘임시의정원법’을 기초하며 임시 정부의 틀을 정립하고, 임시정부에서 국무원 비서장·외무부장․임시의정원 의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한국독립당의 창당위원장 및 부위원장 등 임정의 핵심 간부로서 활동하였다.
조소앙의 업적 중 널리 알려진 것이 삼균주의이다. 1920년대 이론의 기초를 정립한 삼균주의는 민족 해방 운동의 단결을 도모하고 독립국가의 비전을 제시한 이론으로서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핵심으로 삼는다. 즉 고르게 정치에 참여하고, 고르게 잘 살고, 고르게 교육을 받아 개인 뿐 아니라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 균등한 생활을 이루자는 사상이다. 삼균주의는 1930년대 한국독립당의 이념으로 채택된 데 이어, 좌우익 독립운동 단체의 주요 이념이 되었다. 특히 1941년 임시 정부의 대한민국 건국 강령에 삼균주의가 반영됨으로써 독립 후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사상으로 주목받았다. 마침내 광복한 조국에 귀국한 조소앙은 이후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남북협상에 참가하는 등 분단을 막기 위해 힘을 쏟았다. 그러나 남북협상이 실패로 끝나자 사회당을 결성하여 삼균주의의 정책적 실현을 시도했으나 6·25 전쟁 중 납북되어 1958년 북한에서 사망하였다.

조소앙은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 지배, 광복과 분단이라는 역사의 거센 흐름을 고루 경험한 인물이다.
조소앙은 명문가에서 출생하여 6살 때부터 정삼품 통정대부였던 조부 조성룡에게 한학을 배웠고, 성균관에서 수학한 뒤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유학한 수재였다. 명문가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조소앙은 일본에서 약소국 국민으로서 차별 대우를 경험하고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목격하게 되었다.
1904년 인천항을 출발하여 도쿄에 도착한 조소앙을 비롯한 최린, 최남선 등의 황실 유학생은 동경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일본인과 구별된 실업 위주의 차별 교육과 뒤이은 일제의 을사늑약 체결에 반발하여 조소앙을 비롯한 한국 유학생들은 동맹 휴교를 단행하고 기숙사를 퇴사하였다. 중학교의 교육 방침에 대한 유학생들의 평소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지만, 거기에는 을사늑약을 전후한 한국 유학생들의 민족적 울분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때에도 조소앙은 '한․일병합조약'에 반대하는 '한․일합방 성토문'을 작성하고 비상 대회를 소집하려다 발각되어 심한 고초를 겪었다. 1910년에 일제에게 조국의 국권을 피탈당한 이후 조소앙은 멸망한 조국과 가난한 민족을 구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메이지 대학을 졸업한 조소앙은 1913년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규식, 박은식 등이 만든 항일단체 동제사에 가입하고 박달학원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7년 조소앙은 스웨덴 스톡홀름의 국제사회당 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국제 문제로 논의하였으며, 「대동단결선언」을 기초․발표하여 민주공화정이라는 독립국가의 지향점을 뚜렷이 제시하였다. 이듬인 1918년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를 통해 민족 해방의 방법으로 무장 독립을 강조하였다. 민주공화정을 향한 이념은 민중이 주체적으로 참여한 3․1운동 이후 독립국가의 밑그림으로 굳어졌다.
조소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 정부 헌법, 의정원법 기초위원과 심사위원을 지내며 민주공화제 헌법의 기초를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임시 정부 초대국무원 비서장을 역임한 후 국무위원을 선임했고, 영국·프랑스·스위스·네덜란드 등 세계 각국을 돌며 만국평화회의, 만국사회당대회, 국제사회당집행위원회 등에서 활동하여 한국 자주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조소앙은 1922년 임시 정부 외무총장·의정원의장이 되어 의열단원이던 김상옥을 국내에 밀파하여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등을 지원하기도 했다. 1929년에는 김구·안창호·이시영·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교육균등·권리균등·경제균등의 삼균주의를 주장했다. 고르게 교육받고, 고르게 정치에 참여하고, 고르게 잘 살아 개인뿐 아니라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도 균등한 생활을 이루자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한국독립당의 당 이념으로 채택된 데 이어 한국국민당, 민족혁명당 등 좌·우익 정당의 정강과 정책에 채택되었고, 임시 정부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에도 반영됐다.
충칭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을 지낸 조소앙은 광복을 맞은 1945년 임시 정부 요인으로서 귀국하였고, 1948년 김구와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남북 협상에 참가하는 등 통일을 위해 힘을 쏟았다. 같은 해 12월 사회당을 결성하여 삼균주의의 정책적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고, 1950년 2대 총선에서는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 득표를 기록하며 당선되었다. 하지만 6·25 전쟁 때 강제 납북되면서 조소앙과 삼균주의는 잊혀졌다.
주변뉴스
< 1/2 >
주변포토
< 1/2 >
동종 정보 [내위치에서 41.2km]
실시간 관심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