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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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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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박용만 집터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강원 철원군 철원읍 중리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79.5km
“무쇠골격 돌근육 소년남자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

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 다다랐네

(후렴)

만일 대적 연습하여 후일 전공 세우세

절세 영웅 대사업이 우리 목적 아닌가”





이 노래는 한인소년병학교에서 불렀던 야구응원가 중 ‘소년남자가’라는 노래이다. 박용만(朴容萬, 1881~1928)은 1881년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활동하였고, 1904년 보안회 간부로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항거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08년 7월 덴버시에서 애국동지대표회를 열었고, 1910년 6월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열어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1911년『신한민보』주필, 1912년『신한국보』주필로 활동하였으며, 1912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북미지방총회대표로 참가하여 외교원에 선임되었다. 1914년 6월 하와이 오아후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결성하여 단장으로 사관학교를 운영하였고, 1917년 뉴욕에서 개최된 소약국동맹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한 바 있다. 또 1919년 3월 하와이에서 대조선독립단을 조직하고『태평양시사』를 간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에 선임되었다. 1921년 중국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 개최를 주도하고 1922년 텐진〔天津〕에서 대일무력투쟁을 호소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여 창조파로서 활동하면서 1924년 창조파 중심의 인사들이 설립한 한국독립당의 비서장에 선임되는 등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박용만은 1904년 보안회가 주도한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에 의하여 한성감옥에 투옥된 후 여기서 이승만, 정순만과 만나 동지가 되었다. 출옥 후 1905년 2월 도미하여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1908년 <해외애국동지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1908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 입학해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군사학을 부전공으로 택하여 ROTC 과정도 이수하였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09년에는 네브라스카주 커니에 있는 한인 농장 내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열어 한인청년생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았으며 『국민개병설』(1911년)과 『군인수지』(1912년)를 집필했다.

1914년에는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여 미주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하였고, 『국민보』 주필을 맡았다. 이듬해 미국독립정신을 본받아 대한독립을 이루자는 내용의『미국 혁명사』를 출판하였다. 1913년 2월 박용만의 초청으로 이승만이 하와이로 와서 독립운동에 협력하였으나, 이후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하와이 교민집단을 두 집단으로 쪼개 버렸다.

1917년 뉴욕에서 열린 약소국 동맹회에 참석하였으며, 『태평양시사』를 창간하여 주필이 되었다. 1919년 길림에서 결성된 대한독립의군부의 창립에 관여하였고 의군부의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3월 대조선독립단 하와이 지부를 조직하고, 4월 3ㆍ1운동에 관련된 문서를 편집, 「한국인의 봉기와 독립 선언서 등에 대한 진실」"이라는 책자를 발행하였다.

1919년 5월 17일 하와이를 출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고, 1919년 9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외무총장에 선출되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뽑은 임정이 외교노선의 성향을 띄자 취임하지 않았다. 1920년 4월 베이징에 도착한 박용만은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하는 신채호, 신숙, 이회영 등과 함께 <군사통일회의>를 결성하였다. 1921년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이 드러나자 <이승만 성토문>을 발표하고 임시정부를 반대하며 군사통일회의에선 상해임정과 임시의정원 불승인안을 통보하였다. 1921년 군사통일회의는 박용만, 신숙, 박건병 등을 국민대표회주비회원으로 선출하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1925년, 하와이에서 열린 태평양 연안 국제신문 기자대회에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이듬해 군사운동의 근거지 확충을 목적으로 베이징에 대본공사를 설립하는 한편, 1927년에는 초등 국어 교과서를 편찬하여 교포의 국어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1928년 10월 17일 베이징에서 친일파라는 누명을 쓰고 독립단 단원 이구연(일명 이해명) 등에게 암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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