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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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화의학원 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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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协和医学院旧址
  • Xiéhé yīxué yuàn jiùzhǐ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베이징 베이징 둥청구 东单北大街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951.8km
1920년대 김산ㆍ이용설 등이 다녔던 학교 ... 김산(1905~1938)의 본명은 장지락이다. 그는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계통의 중학교에 다니던 중, 3ㆍ1운동 후 일본 동경東京로 건너가 고학생활을 하다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만주 삼원보 신흥무관학교를 다녔다. 1920년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기관지『독립신문』 교정원으로 일하면서 흥사단에 가입하기도 했다. 1921년 베이징 협화의학원에 입학해 의학을 공부하던 중, 북경지역에서 크게 풍미하던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과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하면서 사상적 전환을 가져왔다.
1923년 김성숙등과 함께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고, 잡지『혁명』을 간행하는 한편 1924년 고려공산당 북경지부 설립에 참가했다. 1925년 중국 대혁명에 동참하기 위해 혁명의 본거지 광동廣東으로 간 그는 1926년 김성숙 등과 조선혁명청년동맹을 조직하여 중앙위원을 맡고, 기관지『혁명운동』의 편집을 담당했다. 또한 황포군관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광동에 머무는 동안 의열단 중앙 집행위원 선전부원으로 활동하였고, ‘중국인의 후원 하에 조선 독립을 실현시킨다’는 목적 하에 조직된 유월혁명동지회留越革命同志會의 중앙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12월 중국 상해에서 개최된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광동대표로 참가하였으며, 중국의 국공합작이 깨져 국민당과 공산당이 싸울 때 공산당의 광동꼬뮨에 참가하였다. 1929년 봄 북경으로 넘어가 중국공산당 북경시위원회 조직부장이 되었고,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에 가입하여 민족대당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만주 지린에서 열린 조선혁명청년연맹 대표대회에 참가하여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해체 후 조선공산당 당원의 중국공산당 가입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북경에 돌아와 활동하던 중 1930년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몇 달 만에 석방되었다. 1931년 베이징으로 탈출했으나,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의심을 받아 당적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1932년 보정 제2사범학교와 고양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는 한편 농민대중의 의식계몽에 힘을 쏟았다. 1933년 북경에서 다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가 1934년 석방되었다. 1936년에는 상해에서 김성숙ㆍ박건웅 등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였으며, 1937년 동 동맹의 중국 섬감령 소비에트지구 주재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후 중국 연안으로 가서 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ㆍ물리학 등을 가르쳤으나, 중국공산당의 의심을 받아 1938년 처형당하였다.
협화의원은 록펠러 재단이 세운 학교로 독립운동과 관련해서는 김산ㆍ이용설 등이 다녔던 곳이다.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망명했던 김산은 북경으로 거처를 옮겨 이곳 협화의원에 재학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였다.

청화대학교 의과대학원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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