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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하얼빈일본총영사관 옛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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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日本驻哈总领事馆旧址
  • Rìběn zhù hā zǒng lǐngshìguǎn jiùzhǐ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헤이룽장 하얼빈 난강구 红军街108号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912.6km
1909년 10월 27일

오후 4시가 지나 김성백의 집에 정대호와 사촌 그리고 안중근 가족일행이 도착하는 순간 러시아 헌병이 들이닥치고 그들의 신원을 확인한다. 정대호는 순간적으로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를 '누나'라고 했다. 러시아 관헌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 김성백, 정대호, 그의 사촌동생 정서우를 연행한다. 안중근을 비롯한 공범으로 총 15명의 한국인이 일본총영사관으로 인도됐다.

1909년 10월 28일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의 검찰관으로 에조부치 다카오가 이 사건의 담당검사로 여순에서 하얼빈에 도착했다. 1905년 11월 17일 체결한 '한일보호조약'에 의거하여 한국인의 보호는 일본 관헌이 행하는 것으로 되어있어 러시아 관헌으로부터 안중근 등을 인계받는다.

1909년 10월 30일

검찰관 에조부치 다카오는 하얼빈 총영사관에서 처음으로 안중근을 취조했다. 통역은 서울의 한국통감부에서 파견된 소노키 스에키가 10월 30일부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으로 촉탁되었다. 취조실에서의 안중근은 전혀 주눅들지 않았으며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편한 표정으로 잡담에 응했다. 에조부치 다카오는 시간을 들여 꼼꼼히 자백을 받아낼 작정이었다. 그리고 안중근이 일본 황제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 주목했다

1909년 10월 31일
검찰관 에조부치 다카오는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세명을 취조했다. 그들은 안중근과 암살사건에 대해 전면 부인했고 체포당한 이후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했다.

1909년 11월 1일

에조부치 다카오는 안중근 등 9명에게 구류장을 붙이고 오전 9시에 관독도독부의 헌병대에게 신병을 인도하여 여순감옥으로 호송시키기로 하였다. 하얼빈에 남은 김성화, 정서우 등 6명에 대해서는 모두 석방절차를 밟았다.
오전 11시, 안중근 등 9명은 헌병대위 니티에이 겐지 등 12명에게 호송되어 하얼빈 역을 출발했다. 열차가 하얼빈 교외로 접어들었을 때 약간의 한국어를 구사하는 헌병이 안중근에게 말을 걸었다. "너의 아내도 틀림없이 탄식하고 있겠지?" 그러자 안중근은 "내겐 아내도 아이도 없다."고 말했다.
한편 하얼빈에 남은 검찰관 에도부치 다카오는 총영사관 취조실에서 참고인 진술을 받고 있었다. '정대호의 누나'라고 칭하는 31세의 여인, 안중근의 아내였다. 그녀는 가느다란 몸매에 엄한 추궁에도 시종일관 강인한 모습으로 조금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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