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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여행-시카고[USA Travel-Chicago] 횡단 열차 여행 2/Transcontinental Railroad/History Museum/North Lawndale
1871년 대화재로 도시가 완전히 새로 지어졌고, 고층빌딩이 빼곡하게 들어선 시카고는 미국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로 꼽힌다. 시카고강을 따라 빌딩을 볼 수 있는 건축물 크루즈 투어를 해보기로 했다. 시카고는 현대 건축물의 박람회장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마주치는 건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이 거대하게 새겨진 트럼프 타워다. 가운데가 90년대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던 시어스 타워인데, 지금은 윌리스 타워로 이름이 바뀌었다. 아랫부분이 역삼각형인 최첨단 공법의 이 건물은 수십 개의 건축상을 수상했다. 주상복합 건물인 마리나 시티는 ‘옥수수 빌딩’ 이라고도 불리는데, 50년 전에는 무척 혁신적인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제2의 도시로, LA보다 더 인구가 많았던 시카고에는 철교가 촘촘히 놓여 있어 다니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배들이 다닐 수 있도록 철교는 들어 올릴 수 있게 지어졌다. “1885년 경 120~130만 명이 시카고에 왔죠. 1900년 대 시카고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였습니다.” 최첨단 고층빌딩 사이사이로 100여 년 전에 지어진 건축물들을 볼 수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리글리 빌딩인데, 95년 전에 이런 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시카고가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시카고 역사 박물관을 찾아 그 이유를 알아보기로 했다. 박물관에는 1837년에 만들어진 파이오니아 증기기관차가 전시돼 있다. 1869년 미대륙 횡단열차가 개통되며 동서가 연결되고 산업이 급속도로 발달했는데, 올해가 150주년이 되는 해다. 철도가 개통되기 전에 미대륙을 횡단하는 것은 반년은 걸리는 대장정이었다고 한다. “기차가 생기기 전에는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어떻게 갔나요?” “배로요. 파나마 운하가 아니고, 남아메리카 대륙 남쪽 끝으로 돌아서 갔습니다. 1849년에 (골드러시 때) 사람들이 그렇게 서부로 갔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재즈의 본고장인 남부 뉴올리언스의 유흥가가 해군기지로 수용되자 많은 재즈 음악가들이 일자리를 찾아 뉴욕과 시카고로 떠났다. 시카고로 온 사람 중에는 21살의 루이 암스트롱도 있었다. 그는 시카고에서 활동하며 세계적인 재즈 음악가로 성장했고, 시카고 재즈라는 유파가 생겨났다. 밤에 시카고 시내에 있는 재즈 바를 찾았다. 재즈는 미국 남부 흑인들의 음악이었지만, 1920년대 시카고 시대를 거치면서 인종과 국적을 초월해 사랑을 받는 현대음악으로 발전해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시카고에서는 이후 수많은 재즈와 블루스 거장들이 탄생했다. 오늘도 시카고의 젊은 음악인들은 제2의 루이 암스트롱을 꿈꾸며 이곳에서 공연을 한다. 다음날 시카고 시내에서 멀지 않은 노스 론데일이란 곳을 찾았다. 이 지역 중학교 미식축구 대항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흑인들이다. 노스 론데일의 3만 5천 명 인구 중 흑인이 90%다. 전 날 보았던 시카고의 빌딩숲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느껴진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흑인들은 백인 동네로 이사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고, 이곳에서 수용소처럼 갇혀 살아야만 했다.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앞장서 싸운 사람이 바로 마틴 루터 킹 목사다. 그는 미국 제2의 도시 시카고의 흑백 차별과 빈곤 문제를 해결한다면 다른 지역의 문제도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1966년 이곳으로 이주했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흑백 주거 분리를 반대하는 ‘오픈 하우징’ 운동을 전개했고, 폭력조직에 가입한 젊은이들을 설득해 비폭력 저항운동에 동참시켰다. 킹 목사가 활동하던 스톤템플 침례교회. 일요일 오전에 주민들이 예배를 보러 모인다. 킹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 51년. 지금은 이곳에서도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 이 많지 않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킹 목사가 가장 강조했던 것을 잊지 않고 있다. 자유와 정의의 가치를 자라나는 세대에 전달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킹 목사 추모 사업에) 젊은이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킹 목사가 이룰 수 있었던 것들의 중요함을 알게 되죠.” 루이 암스트롱이 ‘What a wonderful world’를 발표한 다음해, 마틴 루터 킹은 백인 우월주의자의 총탄에 암살됐다. 흑백분리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노스 론데일은 여전히 흑인 빈민 지역으로 남아 있다. 누군가는 마틴 루터 킹이 헛된 꿈을 꾸었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망의 순간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나갈 때만이 멋진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일깨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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