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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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 선양(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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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랴오닝 선양 선허구 故宫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559.4km
◆ 1780년 7 월 11 일(17 일째) 개다. 몹시 덥다. 심양에서 묵다.

◆ 연암이 7월10일 입성한 심양은 난생 처음 보는 중국의 대도시였다. 행궁이 있고 왕릉이 있고 점포가 즐비했다. 두 밤이나 아예 잠을 팽개치고 돌풍처럼 쏘다녔다. 진기한 풍경이 연암의 앵글에 잡혔다. 심양으로 들어가는 길가에서 수백 명의 장사패를 만났는데 그 정경이 가관이었다. 버드나무 뿌리에 걸터앉아 웃통을 벗어젖힌 사내,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 수숫대 껍질로 만든 작은 바구니에 여치나 매미를 잡아놓고 흥정하는 사람, 양매차(楊梅茶)나 제호탕(醍?湯)을 사발로 사서 마시는 사람, 빈랑(檳?)을 씹는 사람, 징을 치거나 목탁을 치는 기름 장수, 땡땡이를 치는 청포(靑布) 장수, 쇠꼬치를 두들기는 이발쟁이….

◆ 심양은 1637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하고, 우리의 진품을 조공으로 빼앗기고, 우리의 왕자를 인질로 잡혔던 그 침략의 총 지휘소였고, 연암이 이틀 밤이나 꼬박 뜬눈으로 탐문한 골동품가게 예속재나 비단 점방 가상루 같은 부상(富商)이 즐비했던 곳이다.

◆ 연암이 배배 뒤틀린 현장이었다. 연암은 야간 통행금지가 엄격했던 행궁의 소재, 심양의 밤을 “누가 나를 찾거든 뒷간에 갔다 해라” 하며 슬며시 숙소를 이탈해 샅샅이 뒤져보았다. 그는 오로지 실학의 기지개를 켜고 있는 청나라의 머리와 가슴을 열어보고팠던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꼭두새벽 세수하고 머리 빗는 일마저 귀찮을 만큼 연암은 지쳤다. 심양을 구경하고 떠나던 날, 그는 말안장 위에 받침대를 깔고 좌우로 하인 창대와 장복이의 부축을 받으면서 드르렁드르렁 도적잠을 잘 만큼 곤했다.

◆ 연암이 야간 구경을 나선 것은 다만 지식욕 때문만이 아니었다. 광적인 정열의 투신이었다. 연암의 이렇듯 광적인 정열은 자칫 북학을 향한 단순 논리나 편향 논리로 비치기 쉽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균형 잡혀 있다. 실학만으로 눈이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부(富)를 위한 물량에 급급하지도 않았다.

◆ 연암은 심양의 문명, 특히 수레를 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퀴의 높이가 팔꿈치까지 닿는 태평거나 수레 채를 겨드랑이에 끼고 미는 독륜거 등을 보곤, 수레는 뭍에 다니는 배요 움직이는 방이라고 치켜세우는 한편 우리 조선에는 아직도 수레란 것이 없음을 통탄했다. 수레를 말한 김에 연암은 불 끄는 수레 수총차(水銃車)를 비롯해 당나귀가 끌면서 곡식을 찧는 맷돌, 수레를 써서 가루를 치는 체, 고치실을 뽑는 이륜(二輪) 소차(?車)를 신기하게 소개한 나머지 따로 ‘거제(車制)’란 글을 써서 부록했다.

◆ 또 이 지방 건설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심양에서 영안교(永安橋)까지 그 진흙 수렁에다 나무를 엮어 200여 리의 다리를 놓은 공법 말이다. 먹줄을 친 듯 정일(精一)한 솜씨라고 극찬했다. 그것은 백성이 수렁을 걷지 않게 하는 배려요, 지방 관가의 재정적 과시였다. 연암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따로 ‘다리(橋梁)’란 글을 쓰면서 ‘다리들은 모두 성문 같은 무지개’라고 술회했다. [참초 : 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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