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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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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2 2-724-0121
1234
    현지어
  • 경희궁
  • Gyeonghuigung (Palace)
    분류
  • 여행/오락 > 여행지
    주소
  •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새문안로 45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7km
왕맥이 흐르는 터 ‘서울역사박물관 뒤편에 있는 궁궐’이라 부르는 경희궁. 조선 왕조의 이궁(離宮)이요, 조선의 5대 궁궐이라지만 여전히 무명(無名)이다. 풍모 또한 결코 그 위상과 같지 않다. 서울의 대표 도심인 신문로와 접한 터임에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경희궁의 터가 서울역사박물관을 아우를 만큼 너른 땅이었음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경희궁은 1623년 광해군이 지었다. 건립 당시만 해도 230만 제곱미터가 넘는 부지에 1500칸에 이르는 대궐이었다. 광해군 이후 철종 때까지 이궁으로 사용했으며 전각만도 100여 동이 넘었다. 광해군이 경희궁을 지은 데는 사연이 있다. 경희궁은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었다. 하지만 그 터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말이 돌자 광해군이 이를 몰수해 궁궐을 지은 것이었다. 인조반정(1623)으로 광해군은 폐위되고 뒤를 이어 인조가 왕위에 올랐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지리가 현실이 된 셈이다. 경희궁은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렀으나 영조대에 이르러 지금의 이름인 경희궁(慶熙宮)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고난과 역경의 일제강점기 경희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가장 철저하게 파괴됐다. 일사늑약(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부터다. 학교를 세우기 위해 궁궐 내의 건물을 철거했고 이를 위해 땅의 지형도 바꿨다. 또한 경희궁 터의 8만2500㎡에는 전매국 관시를 지었고 전각들도 대부분 팔아버렸다. 초창기에는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화문, 황학정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화재(1829 순조 29년)로 소실되고 나머지 전각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숭정전과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각각 옮겨졌다. 1988년 복원 작업에 착수한 후에야 몇몇 전각의 이전 작업이 추진됐다. 경희궁의 흥화문도 이때 이전 복원했다.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과 똑같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기념한 박문사(博文寺)를 장충동에 지으며 절문으로 흥화문을 옮겨 사용한 탓이다. 해방 후에는 신라호텔의 영빈관 정문으로 쓰이다 경희궁으로 돌아왔다. 경희궁 내 흥화문의 현 위치도 창건 당시의 자리는 아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에는 금천교가 있다. 금천교는 보통 궁궐의 정문 안쪽에 세우는 다리다. 이로 보아 그 앞쪽에 흥화문이 자리했을 것이다. 지금의 구세군회관에 해당해 어쩔 수 없이 현재의 자리에 들어섰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현재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이 낡고 이전의 어려움이 있어, 현재의 경희궁 숭정전은 새롭게 지어 복원했다. 국왕이 공무를 수행하던 자정전과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태령전도 새로이 복원했다. 경희궁은 2002년 일반인들에게 개방한 뒤로 21세기의 후손들과 함께 다시금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이후 조금씩 궁궐의 위용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어떤 모습으로 옛 위상을 회복할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우리의 문화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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