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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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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902-2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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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화계사
  • hwagyesa
    분류
  • 여행/오락 > 여행지
    주소
  • 서울 강북구 수유1동 487 (인수봉로47길 117)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9.4km
구석구석 역사와 이야기가 서리다 강북구 수유동에 자리한 화계사는 여염집과 일주문이 몇 걸음 떨어져 있지 않는 도심 속 사찰이다. 2970㎡의 경내에는 팔작지붕 다포계의 대웅전과 명부전, 삼성각, 천불오백성전, 범종각, 보화루, 학서루 등이 가까이 모여 있어 30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그러나 5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킨 고찰의 구석구석에는 거리나 규모로 따질 수 없는 수많은 역사와 이야기가 서려 있다. 화계사는 고려 광종 때 법인대사 탄문이 지금의 화계사 인근인 부허동에 보덕암을 창건했는데, 이 암자를 조선 중종 17년(1522)에 신월선사가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화계사'라 이름을 바꾸었다. 광해군 10년(1618) 9월에 화재로 불전과 요사를 모두 잃었으나, 이듬해 도월선사가 덕흥대원군의 시주를 받아 중건했다. 그로부터 240여 년 후 고종 3년(1866년)에 도해스님과 취견스님이 흥선대원군의 시주를 받아 불전과 승방 건물들을 중수했다. 그것이 최근 1991년 대적광전이 들어서기 전까지의 화계사 모습이다. 역사가 흐르는 국제 포교의 중심 사찰 화계사는 특히 흥선대원군의 원찰 역할을 하며 많은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의 대웅전은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 양식 건물이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목조 건축물이다. 서울시 시도유형문화재 제65호로 지정되었으며, 대웅전 현판은 광화문 현판을 쓴 조선 후기 명필 정학교가, 주련(기둥 글씨)은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 신관호가 썼다고 알려졌다. 대웅전은 일제강점기 우리말을 지키려는 국문학자들의 소신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1933년 조선어학회 소속의 최현배, 이희승 등 국문학자 9명이 대웅전에 기거하면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집필하고 같은 해 10월 29일 발표했다. 일제는 우리말을 통해 민족 사상을 고취하려는 이들을 해체시키고자 했는데 그 감시를 피해 찾은 곳이 화계사 대웅전이었다. 근래에 화계사는 국제 포교의 중심 사찰로도 해외에 널리 알려졌다. 일찍이 화계사 주지를 지낸 숭산스님은 1966년 일본에 이어 이후 40여 년간 세계 32개국 130여 곳에서 한국 불교를 알리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벽안의 제자 무량스님과 현각스님 등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5만여 명에 이른다. 이에 화계사 대적광전 4층은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우리나라로 온 외국인 승려들의 선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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