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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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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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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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종로구 평동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5km
** 길이름 유래 : 경교장이 있어 붙여진 이름. 1938년, 거부 최창학에 의해 지어진 경교장은 백범 김구선생이 해방 뒤 집무실과 사저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4대문 안 길 이름),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 스토리 : 저는 집입니다. 사람은 집에서 태어나고, 집에서 살며,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저는 사람과 언제나 함께 합니다. 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이 떠나고 나면 또 다른 사람이 저의 주인이 되지요. 그렇다보니 저는 다양한 인생들을 목격해왔습니다. 제 이야기가 바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거지요.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저는 최창학이라는 사람에 의해 태어났습니다.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태어난 최창학은 원래는 평범한 행상이었습니다. 봇짐을 둘러메고 각지를 전전할 즈음엔 그가 미래에 거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1923년, 고향에서 우연히 인수하게 된 삼성광산이 부의 시작이었습니다. 삼성광산에서 주로 채굴되었던 것은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긴다는 금이라는 금속이었다고 합니다.

찰리 채플린이 나온 <황금광시대>라는 영화를 기억하실 텐데요. 황금광시대가 미국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점당하던 시절, 바로 이 땅에서도 황금광시대가 있었습니다. 1930년대에는 하나의 군(郡)당 평균 20-30개의 광산이 생겼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한 데가 있습니다. 어떨 때 보면 다들 너무 제 각각 다르고 또 그런 각자의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황금에 미치는 것을 보면 남녀노소, 직업도 따로 없습니다. 행상이나 노동자는 말할 것도 없고 농부에서부터 돈 많은 의사, 지식인 축에 든다는 소설가까지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였던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이러니한 사람은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KAPF) 소속의 소설가 김기진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낮에는 금을 찾아다니고 밤에는 자본주의를 배척하는 글을 썼다고 하니 주경야독은 맞는데 참으로 이중적인 주경야독이었던 셈입니다. 소설가 채만식의 <금의 열정>이라는 소설은 이러한 시대를 반영한 작품이었던 겁니다. 일본은 전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금이 필요했고, 강대국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금광을 일부러 개발하지 않았던 조선의 정책 탓에 이 땅에는 금이 널려있었다고 하니 두 가지 상황이 맞아떨어져 황금광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지요.

다시 한 번 하는 이야기지만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금이란 것을 가지려는 목적이 잘 살기 위해서 아니었나요? 그런데 사람들은 오히려 그 금을 가지기 위해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기도 하더군요. 금광에서 일을 하다가 금광석을 몰래 가지고 나오려고 항문 속에 숨기는 고통도 불사하는가 하면, 검사를 피하기 위해서 자해를 하기도 했답니다. 한번은 러일전쟁 중에 대마도 인근에 침몰했다는 러시아 군함 나히모프호에 금괴가 실려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 배를 찾기 위해 무려 70년이 넘는 인생을 탕진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1980년에 배를 건져보니 배에는 금이 아니라 주철만이 실려 있었습니다. 허허.

하여간, 젊은 나이에 맨주먹으로 시작하여 노다지를 발견하고 거부가 된 최창학은 자신의 부를 마음껏 누렸습니다. 예쁜 아내를 얻고, 조선에서 유일하게 뷰익이라는 차를 몰았습니다. 그리고 1938년,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저를 지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종종 사람들에게 집은 단순히 사는 장소가 아니라 부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주인은 저와 처음 만난 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나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 대단한 거부 최창학이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상징물이란 말이다. 사람들은 나를 만나기 전에 너부터 보며 주눅이 들겠지. 이 최창학이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를 알게 되겠지. 핫핫.”

‘집이란 것이 주인을 상징하는 상징물이 되기도 하는구나.’

저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태어났을 때 제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창학은 오랫동안 저의 주인으로 남아있지는 못했습니다. 최창학은 대표적인 친일파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정부에 비행기를 헌납하는가 하면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한 독립투사들과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일생일대의 위기가 다가옵니다. 해방이 된 것입니다. 최창학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에게 저를 헌납했습니다. 저의 주인은 그렇게 한번 바뀌었습니다. 새 주인은 일본식의 옛 이름을 버리고, 저에게 경교장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당시에 제 근처에 경교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딴 것입니다. 저는 처음 주인과는 달리 새 주인을 존경했습니다. 저를 부의 과시를 위한 목적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목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김구 선생은 저를 조선 민족의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한 집무실로 사용한 것입니다. 김구 선생은 저를 처음 만나던 날 말했습니다.

“너는 이제 태어날 위대한 대한민국의 시작이 될 것이다.”

집에 불과한 제가 한 나라의 시작이라니. 어리둥절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한 거부의 자랑거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 민족의 운명을 짊어진 것입니다.

‘집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많은 의미를 가져다주는구나.’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때문에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비극을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1949년 6월 26일 일요일. 김구 선생은 평소와 다름없이 새벽 5시에 일어나 중국시선을 읽고 휘호를 썼습니다. 전국에서 휘호의 요청이 들어왔기 때문에 틈틈이 써 놓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어서 자신이 설립한 마포 창암 학원 관계자를 접견하고 학교 운영방안을 상의했습니다. 이때 포병소위 안두희라는 사람이 찾아와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오후 12시 40분에 면담이 이뤄졌고 곧 이어 4발의 총성이 연이어 울렸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끔찍한 총알은 김구 선생의 목숨을 빼앗고, 저의 유리창에도 두 개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 사건의 배후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지만 저는 집인 탓에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저는 집이라는 것이 사람이 사는 곳만이 아닌, 삶을 마감하기도 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는 다시 첫째 주인인 최창학에게 반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저의 옛 주인은 저를 소유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노인이 되어있었습니다. 거부도 나이 앞에서는 무력했던 모양입니다. 저는 타이완의 대사관저로 사용되기도 했고 6.25 전쟁 대는 미국의 특수부대가 주둔하기도 했습니다. 1967년에는 삼성재단에서 저를 매입하여 최근까지도 강북 삼성병원 본관이 되었습니다. 저는 병원 건물로 사용되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지켜보았습니다. 참으로 덧없는 여러 삶들을. 저는 현재 서울시에 의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의 모습으로 원형복원 중에 있습니다. 복원이 완료되면 제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게 될 것입니다. 제 첫 주인과 두 번째 만났을 때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그때 그는 노인이었습니다.

“집도 사람과 함께 나이가 드는 법이다.”

그가 말했습니다.

‘저는 사람이 아닌데도 나이가 든다고요?’

“그래, 단지 목재가 낡고 페인트가 벗겨지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너를 거쳐 간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직하는 것, 그게 집이 나이를 먹게 되는 거야.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너는 아이였지만 이제 너는 나와 같은 노인이 아닐까.”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노인은 그 말을 남기고 저를 떠났고, 그 후로는 그를 영원히 볼 수 없었습니다. 제가 노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간 보았던 수많은 무상한 인생들이 떠올랐습니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젊은이들과는 달리 노인은 곁에 말 상대가 있어주길 원하지요. 지금 경교장길을 걷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저에게 잠깐 들러서 말상대라도 해주고 가세요. 제가 간직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릴 테니까요.

※ 서울시는 강북삼성병원과의 협의를 거쳐 병원시설을 완전히 이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의 모습으로 원형복원하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사적 제465호인 경교장 정밀조사 중, 각 층 천정의 지붕부와 2층 동쪽 서재의 내부 벽체 등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4대문 안 길 이름),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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