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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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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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
    주소
  • 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5km
** 길이름 유래 : 경희궁은 ‘야주개 대궐’이라고도 한다. 당주동 근처에 경희궁이 있는데 경희궁 흥화문 현판의 글씨가 어찌나 명필인지 빛이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야주개는 당주동의 마을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 스토리 : “경희궁은 ‘야주개 대궐’이라고도 불렸단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년은 호기심에 크게 뜬 두 눈을 깜빡였다. 1905년, 일곱 살 소년의 할아버지는 한문도 가르쳐주셨지만 가끔 신기한 이야기도 곧잘 해주셨다. 사실 소년은 한문공부보다는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더 즐거웠다.

“야주개는 밤에도 환하게 밝은 고개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야. 경희궁 흥화문의 현판글씨를 당시 현감이었던 명필 이신(李神)이란 사람이 쓴 것이라고 한경지략(漢京識略)이란 책에서는 적고 있는데, 그 글씨가 어찌나 명필이었던지 밤을 밝힐 정도로 빛이 났다는 거야.”

“그래서 우리 동네를 야주개라고 부르는 거구나! 그런데 얼마나 명필이었기에 빛까지 나요?”

“글쎄... 하지만 생각해보면 빛이 나는 것이 글씨뿐이겠니. 이 할애비는 너에게서도 빛이 나는 것이 보이는 걸?”

“제게서 빛이 난다고요?”

“그럼, 어두운 미래를 밝힐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란다. 나야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너는 다르잖니.”

소년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무슨 소린지 잘 알지 못했다.

“경희궁은 어떤 곳인데요?”

“처음 창건 때는 유사시에 임금께서 본궁을 떠나 피우(避寓)하는 이궁(離宮)으로 지어졌는데, 궁의 규모가 워낙 크고 여러 임금이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동궐이라 불린 창덕궁처럼 서궐이라 불리고 중요시되었대. 이 궁이 창건된 것은 1617년(광해군 9)으로, 당시 광해군은 창덕궁을 흉궁(凶宮)이라고 꺼려 길지에 새로운 궁을 세우고자 했고,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을 창건했지. 그런데 정원군(定遠君)의 옛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의 말을 듣고는 그 자리에 다시 궁을 세우고 경덕궁이라고 했어. 그러나 광해군은 이 궁에 들지 못하고 그만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났던 거야. 인조가 즉위했을 때 창덕궁과 창경궁은 인조반정과 이괄(李适)의 난으로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에, 인조는 즉위 후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단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복구된 뒤에도 경덕궁에는 여러 왕들이 머물렀고, 이따금 왕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했대. 19대 임금인 숙종은 이 궁의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났고, 승하한 것도 역시 이 궁의 융복전(隆福殿)에서였어. 20대 임금인 경종 또한 경덕궁에서 태어났고, 21대 임금인 영조는 여기서 승하하였지. 22대 임금인 정조는 이 궁의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고, 24대 임금인 헌종도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고 들었어. 1760년(영조 36) 경덕궁이던 궁명을 경희궁으로 고쳤는데, 그것은 원종의 시호가 경덕(敬德)이라 음이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단다.”

“와, 그렇게 수많은 임금님이 거쳐 간 궁이 우리 동네에 있다구요?”

“그럼, 지금은 일본제국에 의해 주인을 잃었지만 숨결만은 아직도 남아있을 거야. 너도 궁 앞을 지날 때마다 경희궁에 살았던 왕들을 떠올리며 꿈을 키우거라.”

소년은 왠지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후로 소년은 야주개길을 따라 경희궁 앞을 지날 때마다 그곳이 주인을 잃은 옛 궁으로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특히 흥화문의 현판을 눈여겨보게 되었는데, 할아버지의 이야기 중 다른 것들은 모두 이해가 갔지만 현판에서 빛이 났다는 이야기만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지 않고서는 믿기 힘들었던 것이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앞을 지나다니며 현판을 눈여겨보던 소년은 어느 날부터는 해가 지면 아예 흥화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일이 되었다. 현판에서 빛이 나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자 오기가 났던 것이다. 소년은 나름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앞으로의 미래를 밝힐 빛이 보인다고 했다. 소년은 그 말을 믿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만약 현판에서 빛이 나는 것을 확인한다면 할아버지의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매일 해가 지면 몰래 집을 나갔다가 새벽녘에야 들어오는 소년을 가족들을 꾸짖기도 하고 달래보기도 했지만 아무도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소년의 삼촌은 어느 날 소년을 어딘가로 이끌었다. 소년이 가보니 보성소학교란 곳이었다. 학교라도 다니게 된다면 이상한 행동이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교장이었던 김중환은 소년에게 말했다.

“어릴 적에 배우지 않으면 미래에 스스로를 빛낼 수 없단다. 학교에 다녀보지 않겠니?”

소년은 빛낸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학교를 다니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 학교를 다니려면 먼저 댕기를 자르고 머리를 깎아야 한단다. 구습을 끊고 새로움으로 나아가기 위한 약속 같은 거지.”

소년은 집에 돌아와 할아버지에게 그 말을 전했다. 할아버지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네가 학교를 다니겠다는 것은 매우 훌륭한 생각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전통을 타파해야할 구습으로 생각하는 학교라면 이 할애비는 반대란다. 이 나라 조선을 일본인들에게 팔아넘긴 이들이 모두 구습을 배척하고 신문물을 숭상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조선의 백성인 이 할애비가 어찌 찬성할 수 있겠니.”

소년은 할아버지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한문을 가르쳐주신 할아버지는 곧 학교이자 선생님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년의 마음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신지식에 대한 호기심은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소년은 마음을 돌려보려 밤마다 흥화문 앞에 나가 앉아있는 일을 계속했다. 봄의 어느 날 밤이었다. 별로 늦은 시간이 아닌데도 지나는 이가 한명도 없었다. 봄을 맞아 주변에 핀 꽃들이 저마다의 향기를 토했다. 따뜻한 봄바람이 소년의 살갗을 스쳤다. 소년은 왠지 몽환적인 느낌이 되었다. 그때였다. 소년이 바라보고 있던 흥화문의 현판에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촛불 같던 빛이 점차 밝아지더니 소년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게 빛나며 주위를 환하게 비추었다. 소년은 너무 밝은 빛에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니 현판의 빛은 사라지고 세상은 다시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소년은 그 정도 밝은 빛이라면 동네 사람들 모두가 보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다음날 동네로 나서보니 아무도 어제 밤의 빛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라 마음속으로만 간직할 뿐 아무도 입 밖에 꺼내려고 하지 않는구나.’

소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자신도 그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말은 하진 않았지만 소년은 할아버지의 말씀이 거짓이 아닌 것을 확인했고, 자신도 빛을 내는 인물임을 확신했다.

며칠 후 소년은 자신의 손으로 댕기를 잘라내고 머리를 깎았다. 소년은 깎은 머리를 하고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할아버지는 의외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소년의 배움에 대한 열망을 확인한 것이다.

“너의 의지가 그렇다고 하니 할애비는 더 말릴 이유가 없구나. 학교를 열심히 다녀서 꼭 미래를 밝히는 인물이 되거라.”

소년은 그날로 학교에 등록을 했다. 등록부에 이름을 적는 선생님이 물었다.

“꼬마야 네 이름이 뭐니?”

“제 이름은 방정환입니다.”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어린이’란 단어를 썼으며, ‘어린이날’을 만들고, 아동문학과 어린이문화운동을 일으킨 세계 어린이 운동의 창시자였다. 할아버지의 이야기 듣기를 즐겼던 방정환은 자신도 동화구연가로 이름을 떨쳤다. 듣는 이들은 그가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 배꼽을 잡고 웃었고 슬픈 이야기를 하면 눈물을 흘렸다.

발행이 중지된 ‘조선 독립신문’을 등사판으로 만들어 3.1운동을 알리기도 했다. 한번은 그를 감시하던 순사가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만 눈물을 흘려, 그에게 ‘순사를 울린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는 어린이에게만이 아니라 어디서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감옥에 가서는 죄수들에게, 병원에 입원해서는 의사나 간호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이야기들을 모아 아동문학가로 업적을 남겼다. 어린이처럼 스스로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진보적 인권운동이었다.

한편 경희궁의 흥화문은 우리 민족과 함께 비운의 역사를 걸었다. 1932년, 조선총독부는 지금의 장충단공원 자리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인 ‘박문사(博文祠)’를 지으면서 흥화문을 옮겨와 사당의 정문으로 사용했다. 박문사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헐렸지만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에야 경희궁으로 옮겨졌다. 그나마도 구세군회관 등이 들어선 탓에 원래 위치와 다른 곳에 복원됐다. 흥화문 터에는 표지석만 덩그러니 남아있으며 지금의 흥화문 현판은 옛날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혹시 아는가. 경희궁길을 걷는 누군가가 환상 속에서라도 그 빛을 다시 보게 될런지.

※ 경희궁 근처에서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방정환이 야주개를 밝히던 경희궁 홍화문의 빛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미래를 밝히는 등불인 어린이에게서 빛을 본 것만은 확실하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4대문 안 길 이름),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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