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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옛 경운궁) 중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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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2 2-732-7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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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덕수궁(옛 경운궁) 중명전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서울 중구 정동 정동길 41-11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2km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뒤 태프트․가쓰라 각서(1905.7.29), 제 2차 영․일동맹(8.12), 포츠머스 강화조약(9.5)을 통해 미국·영국·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지도 보호’의 권리를 승인받고,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절차에 들어가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한국에 특사로 파견하였다. 1905년 11월 9일 정동 손탁호텔에 여장을 푼 이토는 이튿날 경운궁에 입궐하여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일본천왕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11월 15일 재차 황제를 알현한 자리에서 ‘보호조약’ 초안을 내놓고 인허할 것을 강요했으나, 황제는 국가의 중대사인 만큼 대신들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11월 17일 오후 3시 일본군이 궁궐 안팎을 에워싸고 무력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중명전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도 장시간 토론 끝에 조약에 반대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자, 이토는 회의장에 들어가 밤늦게 다시 회의를 소집토록 강요하였다. 조약에 반대하는 참정대신 한규설을 밖으로 끌어낸 뒤, 이완용·이근택·이지용·박제순·권중현 등 이른바 ‘을사오적’의 찬성으로 ‘보호조약’이 통과되었음을 일방적으로 선포케 하였다.
이로써 한국정부의 외교권이 일본에 박탈하였고 영국·미국·청국·독일·벨기에 등의 공사관은 영사관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이듬해 1906년 2월에 서울에 한국통감부가 설치되고, 늑약 체결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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