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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교회 이필주 사택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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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정동교회 이필주 사택 터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서울 중구 정동 정동 34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0km
경운궁(덕수궁)의 대한문 남쪽에는 좁은 차도와 인도가 나 있는데, 이 길이 바로 덕수궁 돌담길이다. 이 돌담길을 5분쯤 걸어가면 작은 로터리가 나오고 그 뒤편에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에 하얀 창살이 드러난 교회가 보이는데, 이 건물이 바로 정동교회(정동제일감리교회)이다.
아펜젤러가 우리나라 신자들과 처음 예배를 한 곳은 정동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은행 근처였다. 1888년에 남자 신자는 정동에 있던 아펜젤러의 집에서, 여자 신자는 스크랜튼 대부인 집에서 예배를 보다가 1894년 12월 남녀 신자들이 ‘남녀가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당 건축을 결의하였다. 예배당을 짓기 위해 필요한 약 8천 달러는 교인들이 헌금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아펜젤러 목사가 미국에서 모금해 왔다.
이 교회는 개신교의 건축물이지만 서양 문물을 소개하기도 했고 일제의 침략에 맞서 독립운동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1919년 3·1운동이었다. 당시 정동교회 담임목사였던 이필주(李弼柱, 1869-1942)는 3·1운동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정동교회를 설립한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목사는 미국 감리교 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1885년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인천으로 입국하였다. 주요 활동 목표는 교육사업과 기독교 전파였는데 그 주된 활동무대가 서울의 정동이었다. 아펜젤러는 1885년 한라 짓기로 하였다. 1895년 9월 9일 정초식에 당시 법부대신이었던 서광범이 와서 축사를 하였다. 건축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896년에 지붕을 덮었고, 1897년 가을에 건물 골격을 갖추어 그 해 10월 3일부터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때는 남녀 구별이 엄격하던 시절이라서 가운데에 휘장을 치고 예배를 보았다.(이 휘장은 1910년대 중반에 사라졌다). 봉헌식은 1897년 12월 26일에 하였다. 예배당 봉헌을 기념하여 ‘여성 교육’이란 주제를 놓고 찬반 토론을 벌였는데,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여성들이 이 토론에 참여하였다.
이 건물은 길이 23미터 너비 13미터의 몸체(신랑)에 양쪽으로 길이 10미터 너비 5미터의 익랑이 배치되어 총면적이 380제곱미터(115평)의 규모로 5백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식 고딕 양식을 단순화시킨 빅토리아안 고딕 리바이벌 양식으로 규모는 작지 않지만 지나친 형식과 장식을 피하고 소박함을 추구하여 교회 단독 건물이 아닌 주변의 건물과 어울리는 구성을 추구했다. 외관은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적당한 규모와 완 간결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교회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모퉁이에 사각 종탑을 세웠다. 장식도 화려하지는 않으나 필요한 것은 갖추고 있어서 뾰족 아치, 트레이서리(tracery; 아치창을 다시 분할하는 소형틀), 기둥 등을 사용하였다.
실내로 들어가면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좌우의 벽, 출입구, 창틀 등이 모두 아치로 구성되었다. 다른 하나는 일반적으로 회중석의 벽은 석재로 짜는데 이곳은 각목으로만 짜서 구조가 소박하였다.
시간이 감에 따라 교인 수가 늘어나자 증축을 하게 되었다. 1916년에 1차 증축을 하였고, 1922년에 다시 증축이 논의되어 1926년 기존의 건물에 모퉁이 주춧돌을 종각 남쪽 모퉁이로 옮기고 동으로 3미터, 남으로 4.1미터, 곧 65평을 증축하여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가 되었다.
정동교회에서 3·1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곳이 바로 이필주 목사의 사택이다. 1919년 3·1운동에 앞서 2월 25일 학생단 제2회 간부회와 26일 제3회 간부회, 그리고 28일 밤 중등학교 학생대표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기 위한 모임이 이곳에서 열렸다. 학생단 주도의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있었던 3월 5일에는 연희전문 2년생 이묘묵이 학생YMCA 회장 이병주의 지시로 이곳 사랑방에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이필주 목사는 1919년 당시 정동교회 담임목사였다. 민족대표 33인에는 같은 교회의 박동완 전도사도 참여하였다. 또 정동교회 담임목사를 거친 현순과 전덕기는 상하이 임시정부에도 깊이 관여한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이는 정동교회의 신자들이 3․1운동은 물론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3․1운동 당시 정동교회 담임목사였던 이필주는 누구인가?
이필주 목사는 1869년(고종 7) 11월 9일 서울 정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여덟 살 때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공부하였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5년 만에 공부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부친이 경영하던 실공장에 나가 일하기 시작했으나 18세 때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하였고 그 자신도 흑사병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하였다.
그가 건강을 회복했을 땐 가족(모친과 네 동생)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고된 육체노동으로 가족의 생계를 져야 했던 그는 노동판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행동이 점점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890년 친위대에 들어갔다. 4년간 착실하게 군대 생활을 하여 순조롭게 진급하다가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 와중에 그는 새로 개편된 교도중대에 차출되어 참교(현재의 분대장 정도)가 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이 완전히 끝나자 교도중대는 해산되었고 대신 훈련대가 창설되자 이필주는 이 훈련대에 소속되었다. 그는 1895년에 있었던 단발령과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들과의 싸움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시위대가 창설되었는데 이필주는 이 시위대 부교까지 올랐다.
그러던 중에 김인숙과 결혼하여 얻은 자식들이 전염병으로 한꺼번에 죽고 의병과의 싸움에서 회의를 느껴 영혼의 안식을 얻기 위해 남대문 안의 상동교회를 찾았다. 의사이며 목사인 선교사 스크랜턴(W.B. Scranton)과 청년 전도사 전덕기를 만났다. 자신이 죽는 꿈을 꾼 뒤 기도와 성경공부, 그리고 개인 전도에 전념하여 1903년 4월 스크랜턴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정식 상동교회 입교인이 되었다.
그는 상동교회에 다니면서 주색잡기와 싸움을 끊었고, 군대에서도 제대를 하였다. 변변한 직장이 없었던 그는 처음 몇 달 동안 날품팔이를 하면서 어렵게 지내다가 상동교회 예배당 청소를 맡게 되었다. 그는 매일 교회를 청소하며 교회의 각종 집회에 참석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였다.
이 무렵 그는 전덕기, 최성모와 무척 친하게 어울려서 상동의 삼총사란 별명을 들을 만큼 긴밀한 신앙적 동지들이 되었는데, 이들은 훗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상동교회는 초등교육기관인 공옥학교에 이어 중등교육기관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회원들의 기금과 스크랜턴의 기증으로 상동청년학원을 개설하였다. 진덕기는 필수과목인 성경을 가르치고 주시경은 국어를 담당하여 한글보급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장도빈, 최남선 등은 국사를 맡았다. 남궁억과 현순이 영어와 영문법을, 조성환이 한문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필주는 체육 시간에 도수 체조 및 구기운동을 가르치는 한편 군사훈련도 겸하였다. 남다른 열성과 돈독한 신앙심을 인정받은 이필주 선생은 그 후, 종로 청년회관의 체육교사로 재직하다가 상동 공옥소학교 체육교사로 취임하여, 애국정신과 광복의 뜻을 청소년에게 가르쳤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성경공부와 매년 2차례 실시되는 사경회에서도 빠짐없이 참석하여 목회자로서의 수업을 받아 1907년 미국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정식 전도사로 임명을 받았고 상동교회 지교회로 설립된 이촌동, 북창동, 연화봉의 세 교회를 맡게 되어 정식으로 목회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1907년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들어가 정규 신학교육을 받았다. 1913년 가난한 교인들이 많은 왕십리교회에 파송되어 목회하였고 1915년 마침내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8년 6월 연회에서 정동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1919년 천도교와 개신교가 주축이 되어 추진한 3․1운동 준비가 긴박하게 이루어지던 2월 26일, 기독교 측 인사들이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 사무실에 모여 기독교 측 민족대표 명단을 확정하였다. 한다. 이 날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의 초안을 읽고 동의를 표하여 이필주는 박동완 전도사와 함께 정동교회를 대표하여 33인의 민족대표로 참여하게 되었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바뀐 곳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을 마친 후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다. 당시 심문조서에 의하면 이필주가 체포되어 일본 검사가 “그대는 무슨 목적으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일반에게 배포했는가?”라는 심문에 대하여 “그것은 동양 평화를 주창하여 조선의 자유 독립을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권을 회복한다는 뜻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검사가 “앞으로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고 묻는 말에 대하여 그는 “그렇다. 어디까지든지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라고 당당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그는 1921년 11월 4일 공덕동의 경성감옥에서 출옥한 뒤에도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1942년 4월 21일 수원 남양에서 영면을 하였다.

정동교회에는 이필주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 현순
현순(1880∼1968)은 정동교회의 5대 목사를 역임한 뒤 1919년 3·1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뒤 평화회의가 열리는 중국 상하이에 밀파되어 미국대통령 윌슨과 평화회의측에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다. 그리고 국내외의 독립지사가 상하이에 모이자, 이광수·선우혁 등과 함께 프랑스 조계 바오창로(寶昌路)에 임시독립사무소를 개설하였다.
같은 해 4월, 서울에서 개최된 국내 13도 대표의 국민대회에서는 평정관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13일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외무차장을 맡았다. 그 해 9월 20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 연해주·만주 등지에서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귀환한 뒤 11월 14일 내무부 차장직을 사임하였다. 1922년 7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외곽단체인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 손정도
손정도(1872∼1931)는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유년기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던 관리 지망생이었다. 그러다가 1902년 평양에서 조씨 성을 가진 목사의 집에서 투숙하다가 그의 말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기독교로의 개종한 뒤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의 동기로 조만식, 선우혁 등이 있었다. 그는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1909년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10년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연회에 참석, 청나라에 파견될 감리교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어 연수차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베이징 체류 중 조성환을 만났는데 그를 통해 안창호를 소개받아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1912년 하얼빈에서 조선총독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암살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되었다. 유배기간에도 그는 성서를 가르치고 예배를 인도하여 순사, 형사를 비롯하여 유배지 근처의 주민, 수십 리 밖의 진도 신자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선교활동을 하여 기독교인으로 개종시켰다.
1914년에 석방되자, 그해 6월 동대문교회의 담임목사로 1년간 목회하여 많은 신자들을 모았다. 1915년 현순 목사의 뒤를 이어 정동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는 교회에서 남반 여반을 갈라놓았던 휘장을 제거하고 목회에 열중하여 신자를 많이 늘렸다. 1918년 정동교회 목사를 그만 두고 평양으로 이사를 간 그는 1919년 2월 국내에서 3·1 운동 시위 계획에 참여하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파리강화회담에 참석한 김규식으로부터 정부수립 요청을 받고 현순, 안창호 등이 임시정부 조직을 추진하였고 손정도는 뒤에서 실무조직에 착수하였다. 그 해 4월 10·11일 양일간 김신부로(金神父路) 회의장에서 열린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의장 이동녕이 이틀 만에 사퇴하자 4월 13일에는 이동녕의 후임으로 제2대 임시의정원 의장이 되었다.
이무렵 서울에서 공포된 조선민국임시정부의 평정관(評定官)에 선출되기도 했다. 1919년 9월 통합임시정부 발족에 참여했고, 통합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임시의정원 기초위원이 되었다. 1920년 1월 김구·윤현진 등과 함께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는데 가담했다.
1921년 3월 3일에 조직된 대한야소교진정회의 회장이 되어 국내외 각지의 교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해줄 것을 청하는 진정서를 발송하였다. 1921년 8월 임정국무원 교통총장에 임명되었고, 1922년 2월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되었으며, 8월에는 김구·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노공부장(勞工部長)를 지냈다. 동시에 휴일에도 교회활동과 교육활동에도 참여하여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장을 맡기도 했다.
1923년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이탁(李鐸)과 함께 평안남도 대표로 참석하여 재정위원에 선임되었다. 홍진·이시영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만주에 지린(吉林)으로 되돌아가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건강을 돌보지 않은 탓에 과로와 격무, 체력저하, 스트레스, 고문후유증 등에 시달리게 되었다. 1931년 1월 그는 한 동포 집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져 별세하였다.


○ 박동완
박동완(1883∼1941)은 1885년 12월 27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도곡리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주한 뒤 한성중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하였다. 1911년 학교가 폐쇄되자 배재학당 대학부로 전입하였다.
그는 1915년 12월 7일 창간된 《기독신보》의 편집위원으로 참여했고, 정동제일교회에 전도사 및 조선중앙YMCA 위원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19년 2월 하순 박희도의 권유로 3·1 만세운동에 합류하여 개신교측의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 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선생은 기독교계 언론을 통해 언론 계몽활동에 매진하였으며, 1927년 1월 이상재, 안재홍과 함께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본부 상임간사를 맡아 활동하였다.
1927년 12월 9일, 중국 동삼성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중국관헌으로부터 귀화를 강요당하며 박해 받는 일이 벌어지자 이에 대응하고자 ‘재만동포옹호동맹’가 창립되었는데, 그는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임명되어 1928년 1월 이도원과 함께 만주의 봉천성(현 요령성)과 길림성 일대를 돌며 재만동포의 상황을 조사하고 돌아왔다.
1928년 중반 미주 오아후 섬의 한인기독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약 12년간 목회를 하였고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확장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화까지 두루 가르치며 교포 2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다가 1941년 초 병을 얻어 그해 2월 23일 하와이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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