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8
  • 언어선택
숭인동길
+
1234
    주소
  • 서울 종로구 숭인동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5.0km
** 길이름 유래 : 조선시대 이 일대의 지명인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의 첫 글자를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숭인 2동 242번지 일대는 조선 초기에 형성된 채소 시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 시장은 여자들과 남자는 7세 이하만 드나들 수 있어 금남(禁男)지역으로 흔히 ‘여인 채소시장’ 이라 불렀다. 이곳에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

** 스토리 : 2009년 어느 무덥던 여름 날 나는 동대문구 숭인동 뒷산 숭인 근린공원에 있는 동망봉에서 ‘정순왕후 경모 굿 대제’가 열린다는 정보를 접했다. ‘단종애사’가 있듯이 ‘단종 비 애사’도 있다는 말에 관심이 끌렸다. 나는 마침 휴가 중인 남자 친구를 앞세우고 시작 시간보다 이른 아침 일찍부터 숭인 공원으로 갔다. 좀 앞자리에 앉아 굿을 찬찬히 지켜보고 싶어서였다.

“무슨 젊은 여자가 무당을 그렇게 좋아해?”

남자 친구가 투덜거리며 멍석이 깔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당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 소설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러는 거야.”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경이었는데 벌써 날씨는 푹푹 찔 조짐을 보였다. 이미 커다란 흰 천막이 쳐져 있었고 천막 안에서는 굿을 위한 상을 차리느라 부산했다. 당주 김은경 씨와 그 문하생들과 그밖에 뜻있는 분들이 사비를 들여 치르는 굿이라고 들었는데 상차림이 범상치를 않았다. 굿거리를 뛸 무속 인들이 오색의 무복들을 안고 나타나 단장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울긋불긋한 홍남색의 치마저고리부터 색동 한복, 무복, 오색의 띠, 칼, 왕후 대례복까지 화려하고 요란스러운 옷들이 눈에 띄었다. 무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굿을 지켜보았다.

한창 굿이 무르익고 구경꾼이나 굿하는 사람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어 정순왕후의 넋을 기리던 중에 한 예쁘장한 문하생에게 정순왕후의 넋이 실렸다. 얌전하게 뒷전에 앉아서 무당들의 옷 입고 벗는 일을 거들고 있던 소녀 같은 어린 문하생이 갑자기 울먹이며 앞으로 나섰다. 여고생을 갓 벗어난 티가 완연했다.

“열다섯 살에 혼인하여 열여덟 살에 생이별하고 끝내 수절 과부가 된 이 기가 막힌 운명을 이리도 달래주고 한을 풀어주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내 기구하고 한 많은 삶을 어찌 다 말로 한단 말이냐? 곧바로 상왕을 따라가지 못하고 모진 목숨이 천수를 누렸으니 그 죄 값은 또 어이하리.”

얌전하게 수줍음을 타던 어린 여자의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말은 청산유수요 몸놀림은 우아한 왕후의 자태 그대로였다. 섧고도 섧게 흐느껴 우는 어린 정순왕후의 재현에 사람들은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당주는 그 앞으로 나아가 공손하게 물었다.

“이리도 슬피 우는 분은 대관절 뉘시옵니까?”

“나는 십 칠세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단종의 비 정순왕후니라.”

“이 어리석고 미련한 인간들이 몰라 뵈었습니다.”

당주는 정순왕후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화려한 궁중 대례복을 급히 가져다 그녀에게 정성스레 입혔다.

“평민으로 쫓겨나가 남루한 소복 차림에 살다가 세상 떴거늘 왕후 복이 웬 말이냐? 이렇게 차려 입고 보니 기쁘고도 서럽구나. 육십년 넘게 천민보다 못하게 살아 밥 한 번 배불리 먹은 적이 없었느니라. 이 풍성하고 맛난 음식으로 나를 대접하니 이 고마움을 무엇으로 갚아야 좋겠느냐?”

정순왕후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눈물을 철철 쏟으며 산더미같이 쌓인 음식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말갛게 고운 눈망울을 가진 앳된 문화생의 턱 밑으로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져 내렸다. 당주는 실지로 정순왕후를 대하듯 정중하게 허리 굽혀 문하생 뒤를 따르며 정성을 다해 받들어 모셨다.

“마마, 진지 상을 차려 올리리까? 하명만 내리소서.”

“아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듣기만 해도 한이 풀리는구나. 나보다 더 한이 많고 서러운 분은 내 남편 단종이시다. 그분을 잘 챙겨 모셔라. 내가 그분을 모시지 못했으니 그 죄를 받아 모진 목숨을 죽은 것처럼 살았나보다.”

법사의 처량한 피리 소리가 잔잔하고 고운 여자의 서러운 눈물과 함께 애연한 목소리에 젖어 나는 흐느끼며 울었다. 그 순간 남자친구가 억세게 내 손목을 잡아끌며 억지로 나를 굿판에서 끌어냈다. 나는 너무도 아쉬워 굿판으로 되돌아갈 태세였으나 남자친구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럴 수가 없었다. 온 몸에 비 오듯 땀을 쏟으며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의대생인 그는 평소에도 무속 신앙이니 굿이니 미신이니 하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남자였다. 어렵게 휴가를 얻어 아침부터 굿판에 끼어 앉았으니 화를 낼만도 했다. 굿판에서 빠져나와 하루 종일 남자친구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영화를 보고 데이트를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오로지 정순왕후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너 정말 왜 이래? 정신이 딴 데 가 있지?”

결국 냉면을 저녁으로 먹다가 그는 화를 내고 식당을 나가버렸다. 나는 그를 쫓아가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인터넷에서 정순왕후에 관한 모든 것을 검색해 보는 일이었다. 검색을 하면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밤늦게까지 정순왕후에 대해 알아가는 동안 오전에 보았던 굿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 많은 사람 중에 해맑고 단아한 어린 처녀에게 정순왕후의 넋이 실릴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15살 단종 비로 간택될 때 아마도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꿈속에서 정순왕후가 나를 찾아왔다. 굿판에서 본 그 처녀였다. 꼭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며 나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내 한 많은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세상에 알려 주세요. 그 은혜는 받게 될 거예요. 나를 주인공으로 쓴 그 소설을 많은 사람들이 읽게 될 테니까요. 감추어진 이야기도, 서러운 이야기도, 눈물겨운 이야기도 하나도 빠뜨리지 마세요. 부탁합니다.”

나는 잠에서 벌떡 깨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못 다한 사랑’이라는 소설의 영감을 꿈에서 얻은 것이다.

단종은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되고 1457년 6월,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된다. 단종 비 송씨는 영월로 귀양 가는 단종을 따라 청계천 영도 교까지 따라와 울며 이별한 후 그 길로 동대문 밖에 초막을 짓고 시녀 셋과 함께 곤궁하게 사는 데서부터 소설을 시작할 것이다.

밤낮없이 송씨는 동쪽 산봉우리(동망봉)에 올라가 단종이 있는 영월을 향해 그리움을 전했다. 그 해 10월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자 송씨는 소복차림을 하고 매일 조석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려왔다. 온 마을 여인네들은 송씨가 너무 가여워 그녀의 통곡 소리에 맞추어 땅 한번치고 가슴 한번을 치는 동정곡(同情哭)을 한다. 그 장면을 생각하면 코끝이 찡해 왔다. 송씨는 그 후 출가를 했는데 시녀 셋이 더불어 삭발하여 한 여승은 송씨 곁에서 시중을 들고 다른 두 여승은 동냥을 하여 송씨의 끼니를 이어 나갔다. 그것을 안타까이 여긴 동네 아낙들이 반찬거리를 송씨 초막에 가져다주었으나 조정 관리들이 그마저도 금지시키고 말았다. 몰래 몰래 야채나 곡식을 날라다 주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관리에게 들키면 요주의 인물이 될 판국이었다. 아낙들은 모여 대책을 세웠다.

“우리 이러지 말고 무슨 방법을 찾아봅시다. 한 사람씩 마마 집에 드나들면 들통이 나기 십상이니 시장을 엽시다.”

“남자들을 못 들어오게 하는 시장을 열면 좋을 텐데.”

“그렇게 만들면 되지요.”

아낙들은 송씨의 초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채소와 곡물을 파는 금남의 여자 시장을 열었다. 송씨에게 푸성귀와 곡물을 대주기 위한 방법이었다. 시장에서 거래를 하는 척하면서 송씨에게 찬거리를 대주자는 속셈이었다. 아낙들의 보살핌으로 송씨는 동냥을 멈추고 살아갈 수 있었다. 송씨가 초막집에서 동냥으로 끼니를 잇는다는 소문이 대궐에 들리자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그 근처에 영빈정이라는 아담한 집을 짓고 식량을 내렸으나 송씨는 끝내 그 집에 들지 않았다.

초막을 정업원(淨業院)이라 부르며 시녀 셋과 함께 이곳에서 명주를 짜서 댕기, 옷고름, 저고리 깃 등을 만들어 내다 팔아 생계에 보탰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바위 밑에서 솟아 나오는 맑은 샘물에 명주를 담갔더니 자주색 물이 들었다. 그 당시 자줏빛 물을 들이던 샘과 명주를 널어 말리던 바위가 아직도 남아있으며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줏골이라 부른다.

1521년 송씨는 82 세로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한다. 단종을 사사한 세조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아들 예종, 성종, 그리고 연산군까지 세상 떠나는 것을 보며 인생무상을 깨닫는다. 왕위를 찬탈하고 사약을 내린 데 대한 무언의 저항도, 낭군의 고혼을 달래기 위해 스스로 짊어진 업보도 다 일장춘몽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담담하게 세상을 떠나는 데서 소설을 마칠 계획이었다.

청룡사의 약사에 의하면 송씨는 머리 깎고 출가하여 희안, 지심, 계지 세 시녀와 함께 업을 닦으며 노 비구니로 조용히 입적하였다고 전한다. 이 세 시녀는 죽어서도 송비가 묻힌 사릉 곁에 묻혔다하니 눈물겹다. 1698년(숙종 24)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복(追復)되자 송씨도 정순왕후로 추복되었다.

단종이 유배 간 영월에서의 생활까지도 소설 속에 모두 담을 예정이다. 단종에게 내려진 사약과 활시위로 목 졸려 죽은 사연, 시신이 동강에 버려져도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못한 이야기들을 세상에 다 들려주고 나면 정순왕후는 한을 풀게 되지 않을까?

나의 ‘못 다한 사랑’이라는 장편소설이 완성되는 날 정순왕후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또다시 내 꿈에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 ‘단종애사’나 ‘단종 비 애사’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나 가슴 절절한 사사로운 사연들은 상세히 소개된 곳이 없다. 여인 채소시장의 유래 역시 좀 더 그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어져 문헌을 뒤졌으나 찾을 수 없어 소설을 가미해 보았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4대문 안 길 이름),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주변뉴스
< 1/2 >
주변포토
< 1/2 >
동종 정보 [내위치에서 5.0km]
실시간 관심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