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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장터-유성의병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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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성장터-유성의병 봉기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대전 유성구 장대동 장대동 282-15 일대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37.1km
유성장터-유성의병 봉기(항일의병운동의 효시) ... 대전시 유성구 장대동 일원 부지에 자리한 유성재래시장은 1910년대부터 내려오는 5일장으로 해방이후 1970년대 초까지 포목·청과·기물·잡화 등이 복합된 인근 최대의 종합 정기시장으로서 유성의 경제적 부(富)를 대표해 왔다. 유성장날은 현재 4일, 9일이지만 장이 처음 열리던 시기에는 5일과 10일에 장이 열렸다. 그러다가 인근의 정기시장과의 관계 등으로 상인들의 불편함을 덜기위해 4일, 9일로 바뀌었다고 한다. 2일이 금산장, 3일이 신탄진장, 4일이 유성장이고 5일이 옥천장, 그리고 1일이 공주장이었다.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소식을 들은 문석봉은 국모의 복수를 위하여 유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국모를 시해한 흉적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조정의 대신을 역임했던 회덕의 송근수와 진잠의 신응조 등이 문석봉의 의병 봉기를 후원하였다. 문석봉은 지휘부를 조직한 후에 각지에 통문을 발송하여 을미사변을 천고에 없는 대변으로 규정하고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여 사직을 건져야 할 것을 호소하였다. 유성 장터에서 부대를 편성한 후 회덕현을 급습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300여 명의 의병을 무장하여 10월 28일, 공암을 거쳐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으나 공주 와야동에서 관군에게 패하여 흩어졌다.

문석봉은 중군 오형덕 등과 함께 경상도 고령 초계 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하였으나 고령 현감의 고변으로 체포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문석봉은 이듬해 봄 영장 최은동 등과 함께 탈출하였으나 이미 문석봉의 집은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져 있었다.

문석봉은 옥고를 치르면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1896년 4월 서울에 들어와 정계의 요로들과 접촉을 시도하고, 이어 원주로 내려가 ‘도지휘’가 되어 각도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문석봉은 병에 걸려 결국 큰 뜻을 이루지 목하고 11월 19일 밤 46세의 나이에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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