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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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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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박상진 집터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경북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469-2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294.9km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는 한국에서의 식민지 통치를 그들 스스로 '무단정치(武斷政治)'로 이름할 만큼 가혹하리만치 폭압적으로 자행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이와같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독립전쟁론에 의거한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 1915년 7월 15일에 결성되었다.
박상진은 대한광복회를 이끌던 인사였다.
대한광복회의 전략은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 1백 개소의 요지에 혁명기지로서 잡화상을 설치하여 무기를 비축하며 조직을 확대해 가다가 일본이 국제적 고립에 빠질 때 전국적으로 일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이었다.
대한광복회는 1918년 발각되면서 조직이 파괴됐으며, 박상진도 피체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4년여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에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박상진을 중심으로한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들이 의병적 조직인 풍기광복단과 합류하여 1915년 7월 15일에 결성한 혁명적 독립운동단체였다.
대한광복회의 전략은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 1백 개소의 요지에 혁명기지로서 잡화상을 설치하여 무기를 비축하며 조직을 확대해 가다가 일본이 국제적 고립에 빠질 때 전국적으로 일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이었다.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은 박상진, 부사령은 이석대가 맡았다.
1917년 이석대가 전사한 뒤에는 김좌진이 부사령을 맡으며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갔다.
총사령 박상진이 만주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서 '총포 화약류 단속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1917년 4월 징역 6월형의 옥고를 치르는 수난과 함께, 노백린과 김좌진이 연해주와 만주 등지로 망명함으로써 대한광복회 조직은 타격을 입기도 했다.
대한광복회의 원대한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그에 따른 군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이들은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집하려 했지만, 식민지 권력체제에 안주한 친일부호들의 외면으로 계획에 차질을 빚고 있었다.
이에 대한광복회는 당초의 계획을 수정하여 당면 과제로써 민족의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 친일부호 처단과 같은 의협투쟁의 방략을 앞세워 나갔다.
그리하여 박상진은 채기중·강순필 등으로 하여금 1917년 11월 칠곡부호 장승원을 처단케 했으며, 1918년 1월에는 열혈지사 김한종·장두환 등이 친일인사인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함으로써 대한광복회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것과 함께 독립운동의 기상을 크게 드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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