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6
  • 언어선택
차기 정부에 주는 '실패의 교훈' (1) 불통인사가 비극의 시작

대선 전 김용환과 거의 매일 통화하던 박 전 대통령
선거 끝나자 전화 안받고 문자마저 외면

원로그룹 '7인회' 인사추천권 행사 못해
공식라인도 불통…'누군가'가 인사 전횡

취임 후 한달간 장관급 5명 줄줄이 낙마
인사 검증기능 마비…박근혜 정부 내내 '악몽'
박근혜 당선인이 2013년 1월24일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기자실에서 초대 총리 후보로 김용준 인수위원장을 지명하는 인사안을 발표한 뒤 김 후보자 인사말을 듣고 있다. 이 자리에는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오른쪽 첫 번째), 진영 인수위 부위원장(두 번째), 유일호 당선인 비서실장(네 번째) 등이 배석했다. 한경DB
[한국경제신문 특별취재팀] 18대 대통령선거 직후인 2012년 12월 말. 김용환 전 새누리당 상임고문(전 재무장관)이 서울 삼성동 오크우드호텔에서 박근혜 당선인을 만났다. 배석자 없는 독대 회동이었다. 그는 준비해온 A4용지 2쪽짜리 건의서를 박 당선인에게 건넸다. 거기에는 경제부총리 부활을 비롯한 여러 제언이 담겨 있었다. 박근혜 정부 초대 경제부총리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인물의 이름도 조언에 포함시켰다. 그는 몇 가지 제안을 한 뒤 “최태민의 그림자를 지워야 하고, 정윤회 씨를 멀리하는 게 좋겠다”고 말을 꺼냈다. 순간 박 당선인의 표정은 싸늘하게 바뀌었다. “이런 말씀 하시려고 저를 지지하셨나요”라는 말이 박 당선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게 김 전 상임고문과 박 전 대통령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대선 당시엔 하루가 멀다하고 박 전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하던 사이였다. 이후 김 전 상임고문은 측근들에게 “이 정부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가끔 청와대 부속실에 면담 신청을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이재만 전 총무비서관, 정호성 전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전 제2부속비서관 등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이 중간에서 차단하는 바람에 면담 신청이 박 전 대통령에게 전달되지도 않았다는 게 측근의 전언이다.

그와 각별한 사이를 유지한 옛 새누리당 한 중진 의원의 증언. “김 전 상임고문은 사정이 이런데도 주변에선 모든 인사를 본인이 좌지우지한다는 소문이 돌아다니는 것에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대선 때까지만 해도 공식 원로 자문그룹 좌장을 맡아 거의 매일 박근혜 후보와 통화하곤 했는데, 대선이 끝나고 나서는 연락이 거의 되지 않았다고 한다”
소원해진 7인회, 의문의 비선라인
김 전 상임고문이 박 전 대통령에게 건의한 경제부총리 부활은 실현됐다. 하지만 인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뤄졌다. 김 전 상임고문은 초대 경제부총리에 자기 색깔이 뚜렷하고 부처 공무원을 휘어잡을 수 있는 성격의 인사를 추천했다. 그래야만 경제부총리직을 부활하는 의미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전직 관료 출신 당 인사인 L씨가 유력하게 거론됐다. 그런데 박 전 대통령이 임명한 첫 경제부총리는 무색무취하다는 평을 받아온 현오석 한국개발연구원장이었다. 관가나 여권에서 전혀 거론되지 않은 인물이다.

친박근혜계로 분류됐던 한 국회의원의 전언. “김 전 상임고문이 추천한 인물이 경제부총리에 임명되지 않았다는 것은 외곽 조언그룹으로 알려진 ‘7인회’가 인사추천권을 전혀 행사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박 당선인은 외부 추천 인사를 믿지 못하고 본인의 수첩에 기록해둔 인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습관이 그때부터 강했다. 4년 후 비극은 당시부터 잉태되고 있었다.”

7인회는 박 전 대통령을 과거부터 지원한 원로들의 모임이다. 김 전 상임고문 외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 강창희 전 국회의장, 김용갑 전 의원, 안병훈 전 조선일보 대표,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현경대 전 의원이 멤버다. 2013년 8월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된 김기춘 전 장관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는 박근혜 정부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강 전 의장과 김용갑 전 의원 등은 사석에서 “인사 추천은커녕 조언해달라는 부탁조차 없었다”며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공식 라인에서 추천한 인사가 발탁된 것도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관련 청와대 수석이 3명, 관련 장관이 3명을 후보자로 추천하고 청와대 인사위원회에서 최종 후보자를 선정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청와대 수석이나 장관이 아니라 ‘누군가’가 추천한 인물이 최종 후보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당시 경제 분야 인사 추천권을 가진 한 관계자의 증언. “내가 추천한 고위직 후보 수십 명 중에 실제 임명장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해당 기관 등에서 평이 괜찮다 싶은 인물을 후보로 올리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비서실장 입에서 나오고 결국 그 사람이 최종 후보자가 됐다. 비선라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의문에 휩싸인 ‘밀실 불통인사’는 정권이 출범하기 직전인 2013년 1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때부터 예고됐다.
불통이 초래한 인사비극
18대 대통령직 인수위가 중반으로 접어든 2013년 1월24일. 서울 삼청동 금융연수원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은 아침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박근혜 정부 초대 총리 발표가 예고됐기 때문이다. 발표가 예정된 시각, 박 당선인이 회견장에 들어와 마이크를 잡았다. 뒤에는 김용준 당시 인수위원장이 서 있었다. 박 당선인의 입에서 “초대 총리 후보자에 김용준 인수위원장”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회견장에서는 탄식이 터졌다. 김 전 위원장이 위원장 자격으로 배석한 줄만 알았던 기자들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깜짝인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김 후보자는 두 아들의 병역 문제와 부동산 투기 의혹 등에 대한 언론의 혹독한 사전 검증을 견디지 못하고 불과 닷새 만에 손을 들었다. 초대 총리 후보자가 청문회를 앞두고 스스로 사퇴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지면서 ‘깜짝인사’는 ‘불통인사’ 논란으로 번졌다. 당시 인수위 내부에선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기대와 달리 깜짝인사는 중단 없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김종훈(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 김병관(국방부 장관 후보자), 한만수(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 황철주(중소기업청장 내정자), 김학의(법무차관 내정자) 등 5명이 부실 검증 논란을 빚으며 3월 한 달 동안 줄줄이 낙마했다.

이 가운데 황 내정자는 공직을 맡기 전 보유 주식을 신탁 후 처분해야 한다는 ‘백지신탁’ 조항에 걸려 낙마했다. 청와대 인사검증팀이 이 조항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내정 사실을 통보했고, 황 내정자는 중기청장직을 수락했다가 보유 주식을 모두 팔아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하차했다. 이명박 정부 청와대에서 인사 업무를 맡았던 A씨. “인사 검증팀이 백지신탁 조항을 몰랐다는 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인수위 시절 이명박 정부 청와대와 공조를 하지 않다 보니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인수위 시절 이명박 정부 청와대 정무 및 민정 라인이 인사 검증 관련 파일을 전달했지만, 박 당선인이 ‘그쪽 사람들을 굳이 쓸 이유가 없다’며 거절하는 통에 활용하지 못했다. 당시 주요 공직 후보자를 검증할 때도 청와대와 정부의 검증 기능을 활용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인선 내용이 외부로 알려질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박 전 대통령의 불통인사 논란은 몇 개월 뒤 첫 미국 방문 기간 중 윤창중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 사건이 터지면서 정점으로 치달았고 집권 첫해 내내 박근혜 정부를 괴롭힌 악몽이 됐다.
'잃어버린 4년' 부른 불통 인사
무엇이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한 나라의 대통령이 조롱거리가 되고, 급기야 죄인으로 취급받는 신세가 돼 대통령직에서 파면당하기에 이르렀다. 정권 핵심 참모와 장·차관들이 현직에 있다가 줄줄이 구속되는 초유의 일도 벌어졌다. 그러는 사이 국가 정책은 송두리째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한 역사가는 이렇게 말한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잃어버린 4년’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현 시점에서 박근혜 정부에 대한 평가는 섣부를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적용된 법 위반 혐의는 아직 다툼 중이다. 하지만 진실 규명과 별개로 이미 대통령이 헌법 위반으로 파면되고, 대통령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모든 일이 중도 폐기 위기에 놓인 점만 놓고 봐도 ‘박근혜 정부는 실패했다’고 규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실패의 원인은 무엇인가. 박근혜 정부 국정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인사들은 한결같이 ‘불통인사에서 비극의 씨앗이 싹텄다’고 지적했다. 한때 친박(친박근혜)계에서 핵심 역할을 하던 인사는 “사람을 쓰는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자 끝이란 점에서 ‘인사는 만사(萬事)’라고 하지만 박근혜 정부 인사는 모든 게 거꾸로 갔다”며 “결국 ‘인사가 망사(亡事)’가 돼버린 셈”이라고 씁쓸해했다.

시작부터 그랬다. 박 전 대통령은 당선 직후 탕평·화합·통합인사를 내세웠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이명박 정부 청와대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1000명이 넘는 각계 인사 파일을 넘겨줬지만, 박근혜 당선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주변에서조차 고개를 갸우뚱하는 인사 카드를 불쑥불쑥 꺼내 들었다. 초대 국무총리 인선부터가 그랬다.

김용준 초대 총리 후보자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하기도 전에 사전 언론 검증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낙마하던 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한 핵심 인사는 “인사 실패가 일찌감치 터져 반면교사가 되면 오히려 박근혜 정부 앞날에는 보약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박 대통령은 이런 기대를 저버리고 불통인사를 계속 밀어붙였다. 누구에게서 추천을 받았고, 어떤 식의 검증을 받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출처 불명의 인사가 이후 4년간 끊임없이 반복됐다.

‘불통인사’는 인사로 그치지 않았다. ‘불통 정책’으로 이어지며 비극을 확대했다. 박근혜 정부의 간판 정책인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이 그랬다. 박 대통령이 어느 날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화두로 툭 던졌을 때 청와대 관련 핵심 참모들조차 어리둥절해했다고 관련 인사들이 증언을 쏟아냈다. 박근혜 정부의 아이콘으로 통한 창조경제도 시작부터 혼란의 연속이었다. 창조경제 주역인 여러 인사의 증언을 종합하면 집권 2년차까지도 창조경제 개념이 잡히지 않았다. 이들 정책뿐 아니라 수많은 국정 과제가 누구 머리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오는지는 미스터리에 가까웠다. 정책 생산자인 관료들은 떨어진 지시를 수행하는 단순 기술자에 불과했다.

박근혜 정부를 중도 하차하게 한 직접적 계기는 ‘최순실 파문’이었다. 지금까지 검찰 수사로 최순실은 문화체육계 인사와 정책 등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국정 농단을 주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초기부터 보인 수많은 실패 단초를 모두 최순실과 엮기엔 무리가 있다는 게 정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인사들의 일관된 증언이다. 한때 박 전 대통령의 참모였던 한 인사는 이렇게 정리했다. “최순실은 박 전 대통령의 불통과 폐쇄형 리더십이 낳은 결과가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한 가지 형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본 기사는 한국경제신문과 온바오닷컴의 상호 콘텐츠 제휴협약에 의거해 보도된 뉴스입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한국경제신문에 있으며 재배포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관련뉴스/포토 (12)
#태그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