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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 태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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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承德府 府学
  • chéng dé fǔ fǔ xué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허베이 청더 청더시구 承德第8中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866.4km
◆ 1780년 8월 9일

◆ 여기서부터 ‘열하일기’ 제6장에 해당하는 ‘태학유관록(太學留·#53949;錄)’에 접어든다. ‘태학유관록’은 문자 그대로 태학관에 유숙하는 엿새 동안(8월9~14일)의 일기다. 다만 8월9일자 일기 중 오전 9시 이전의 것은 ‘막북행정록’ 편에, 오전 9시 이후의 것은 ‘태학유관록’편에 씌었다.

◆ 태학관 생활은 연암보다 먼저 유숙한 사람들과의 격의 없는 토론으로 시작됐다. 대리(大理)에서 온 통봉대부 윤가전(尹嘉銓)을 비롯해 조선에서 온 귀주(貴州) 안찰사 기풍액(奇豊額)과 왕거인(王擧人) 민호(民?) 등이 연암과 대담을 나눴다. 토론의 주제는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았다. 천문, 건축, 목축, 종교, 음악, 문학을 넘나들었다. 그중 17세기부터 조선에 일기 시작한 지전설 같은 천문학이나 황교(黃敎) 같은 새로운 종교 파문이 주의를 끌었다. 조선과 청나라의 역사나 문물 비교는 비록 단편적이긴 해도 두 나라 문화사 정리나 역사관 정립에 시사한 바가 적지 않다.

◆ 특히 연암은 상고사로부터 현대사까지 그 대강을 요약했다. 먼저 우리 고대사를 거론하면서 기자조선이 주나라 무왕(武王)의 봉강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만조선은 당시 진(秦)나라가 연(燕)족을 거느리고 조선에서 편거(偏據), 곧 일부 점거한 것이라고 했다. 그 국토 또한 요동땅을 포함 5000리에 뻗었던 것이 중고(中古)시대에 들면서 5000리 미만으로 줄었다가 고려 이후 연암 당시까지 3000리를 지켰노라고 했다.

◆ 그리고 연암은 당시 조선이 유교를 숭상하고 송나라의 문화와 예속을 따르는 ‘소중화(小中華)’임을 자인했으나 중국 역사에 기록된 조선의 문물이나 예술은 오늘의 조선이 아니고 기자·위만 때의 그것을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중국의 편견을 지적했다.

◆ 연암은 종착지인 열하에서도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갈등과 모순에 줄곧 시달렸다. 태학에 들어온 날, 군기(軍機·청나라 황제의 고문부)의 장경(章京·공문 수발을 관장하는 관원)이 와서 황제의 조서를 전달했다. 다름 아닌 건륭 고희연 자리에 참석할 조선 정사의 반열, 그러니까 외교 의전상 위치를 지정한 것이었다. ‘우반 이품말(右班 二品末).’ 그러니까 우열의 2품품관 끝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자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건지는 몰라도 청나라의 생색이 남세스러울 정도다. 조선 사절을 우반에 세우는 것은 전에 없던 특전임을 강조하고, 한술 더 떠 그 은총에 황감하다는 말씀을 예부에 올려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면 그 감사의 뜻을 황제께 상주하겠다는 것. 조선 사절이 머뭇거리자 독촉을 빗발치듯했다. 조선 사절은 할 수 없이 예부에 글을 올렸다. 황제의 은총에 감격한다고 말이다.

◆ 그렇게 뜻에 없는 감사를 올리고 속이 뒤틀린 판에 또 한번 벼락이 떨어졌다. 국책을 흔들 만큼 엄중한 일이었다. 8월10일, 건륭황제의 조찬에 초대받고 조선 정사와 부사가 궐내에 들어가 삼배구고두의 예를 갖추었는데, 그날 밤 군기대신이 정사를 예방해 또 황제의 명령을 전했다. “티베트의 라마 성승(聖僧)을 만나보지 않겠는가?” 하고. 날벼락이었다. 참모들의 불평이 들끓었다. 정사는 어이가 없었다. 청나라에 외교 사절로 와서 청나라 아닌 비방교국(非邦交國)의 지도자를 임의로 방문할 수 없었기에 말이다. 그런데도 군기대신은 “티베트의 성승은 중국인이나 다름없다”며 압박했다.

◆ 여기서 연암의 천의무봉한 상상이 또 한번 나래를 폈다. 만일 우리 정사가 라마 성승 만나기를 막무가내로 거절한다면? 청나라의 대(對)사절 조치는? 이 일로 우리 사절을 중국의 저 귀퉁이, 운남이나 귀주로 귀양살이 시킬지도 몰라? 그럼 나도 덩달아 구경 길에 오를지도 모르지! 의리로 보아 혼자 귀국할 순 없잖아? 강남땅은 물론 광동땅 월남땅 서쪽땅까지 밟아보리라고.

◆ 연암은 손가락으로 하늘에다 동그라미를 그리며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세상에, 사절단은 난제를 만나 끙끙 앓는데 연암은 철없이 구경할 생각으로 시근덕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 결국 이튿날, 피서산장에서 황제를 알현한 뒤 라마를 예방하고, 그 답례로 금부처 하나 받는 것으로 날벼락은 마무리됐다.

◆ 청나라 선비들과의 대담은 연암에게 새로운 의식과 지식을 안겨주었지만 그만큼 공방도 뜨거웠다. 두 나라 예속에 관한 문제가 특히 그러했다.

◆ 이야기의 발단은 이렇다. 후당에서 곡정과 그의 친구 장성을 만나 두 나라의 혼례 얘기를 나누던 중 곡정이 난데없이 조선 자랑을 듣고 싶어 했다. 연암이 주저 않고 ‘사가(四佳)’, 네 가지 장점이 있노라 했다. 첫째는 유교를 숭상함이요, 둘째는 수재가 없음이요, 셋째는 물고기와 소금을 자가 생산함이요, 넷째는 아낙네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함이라 했다. 연암의 어조는 당당했다. 듣는 이들은 모두 “낙국(樂國)”이라고 찬탄했다. 그러면서도 네 번째 ‘여불경이부(女不更二夫)’ 조항에 대하여 의문을 나타냈다. “온 나라가 그런가?” 하면서 법령으로 금지하는지 물었다. 연암은 법령이 따로 없지만 명색이 선비 집안이면 삼종(三從)의 덕을 지키고 산 지 벌써 400년이라고 설명했다.

◆ 그런데 곡정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불경이부’ 같은 관습의 폐단과 그 비인도성을 들고 나왔다. 그러면서 그보다 더 심한 예를 들었다. 옛날 중국에는 납폐를 하고도 성례를 안 했거나 성례를 하고도 합방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행한 일이 생기면 평생 수절을 했다고. 그것은 약과라고 하면서 친교가 두터운 집안끼리는 뱃속에 든 아이끼리 구두로 혼사를 정했다가 불의의 일로 사내가 죽으면 어린 색시가 독약을 마시거나 목을 매게 하여 한 무덤에 집어넣는 해괴망측한 일을 했다고도 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주검을 따라 바람이 났다 하여 ‘시분(尸奔)’이라 욕질했고, 절개 지키는 화냥질이란 의미의 ‘절음(節淫)’이라고 비아냥거렸다.

◆ 이들의 봉건 예속에 대한 비판은 열렬했다. 눈 속에서 죽순을 캐고 얼음덩이를 깨 잉어를 잡아다 부모를 공양하는 효도로부터 자신의 가슴을 갈라 염통을 꺼내 어머니 병환을 치유했다는 희생적인 효도, 어린 임금을 등에 업고 바다를 건너다 빠져 죽거나 외군에 잡혀가 기름에 튀겨 죽임을 당할지언정 끝내 굴복하지 않은 충렬. 이러한 것들이 반인도적인 충·효라고 꼬집었다. 지나친 충·효는 오히려 천도를 문란케 한다고 힐난했다. 혼·상과 충·효에서 인간주의와 실학이 강조되는 건, 조선의 성리학적 예속사회를 흔들어 깨우는 물결이었다. 여기서 연암은 중국이 탈봉건·인간 회복의 의식운동에서 한걸음 앞섰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 다음 라운드에선 연암이 선공을 취했다. 중국 부녀들의 전족을 물고 늘어졌다. 중국 여인의 활 굽정이 같은 신발과, 바람도 없는데 넘어질 듯 뒤뚱거리는 걸음을 호되게 비꼬았다. 곡정은 솔직했다. 그 역시 전족을 비판했다. 오대(五代) 때부터 전래한 이 악습은 명나라 때 엄금했지만 없어지지 않는다면서. 오랑캐들은 한족 여인네의 전족이 남자들에게 음탕한 생각을 품게 한다거나,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구습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한족이 지닌 민족적인 긍지 때문이라는 등 억측이 난무했다.

◆ 이때 곡정은 ‘삼액(三厄)’을 지적했다. 연암의 ‘사가(四佳)’에 상대적이었다. 삼액은 이러했다. 머리카락을 그물 속에 갇히게 하는 망건은 두액(頭厄)이요, 천하의 독초를 태워 가슴과 머리를 자극하면서까지 무례한 몸짓으로 혼탁하게 연기를 뿜어내는 흡연을 구액(口厄)이라 할 것이요, 위에서 말한 대로 한족 여자들이 발을 싸매는 것을 족액(足厄)이라 할 것이다. 머리와 입 그리고 발을 구속하거나 마비시키는 일이다. 이 세 가지는 사고와 호흡, 행동의 자유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곡정의 ‘삼액’은 중국의 병증을 들추어내는 진단인 것이다.

◆ 연암은 여기서 장군 멍군했다. 곡정과 ‘사가’니 ‘삼액’이니 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했지만 무언가 굼실거리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내친김에 자신을 포함해 조선 사람의 껍데기를 벗겨 그 속살을 보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슬그머니 에피소드 두 토막을 꺼내었다. 그 하나는, 열하에 도착한 날 통봉대부 윤가전이 우리 정사를 만나러 의관을 갖추고 태학관에 왔을 때다. 윤씨는 명함을 전하면서 그 내의를 밝혔지만 정사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만나기를 꺼렸다. 나이 많은 윤씨가 밖에서 오래 서 있다가 돌아갔는데 연암은 이 기회에 조선 대관들의 오만한 뽐내기를 긁기 시작했다. 연암이 보기에 조선 대관은 중국 사람을 만나면 한족, 만주족 가리지 않고, 싸잡아 되놈 취급했다. 그렇게 멸시하고, 도시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들을 반겨 맞기는커녕 개나 염소 보듯 푸대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벼슬하는 양반들은 턱없이 교만했던 것이다.

◆ 또 하나는, 연암의 자기 비추기다. 8월11일 낮, 거리 구경을 나갔다가 과일가게 건너편 깃발이 펄럭이는 술집에 들어섰다. 그런데 웬걸, 몽골 사람과 회회교 사람 수십 패거리가 각기 민속 복장을 입고 시끌벅적했다. 중국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조선 갓에 수정 갓끈을 늘어뜨린 연암은 그 사납고 거센 분위기에 으스스했지만 찬 술 넉 냥을 주문했다.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잔 두개를 담뱃대로 휙 쓸어버리고 큰 보시기를 가져오라 소리쳤고, 그 보시기에 술을 따라 단번에 쭉 들이켰다. 그러고 일어서자 손님들이 술 석 잔을 따라 놓고 권했다. 연암은 단숨에 꿀꺽 마시고 너부시 절을 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 연암은 그렇게 객기를 부린 것이 용기가 아니라 겁이라고 했다. 당당하게 술집을 빠져나왔지만 머리털이 쭈뼛했노라 고백했다. 호탕한 일면을 보였지만, 연암은 자신을 희화화했다.

◆ 8월11일자 일기에서 이 대목 500여 자(한문)를 잘라내면 또 한 편의 명문이 된다. 필자는 ‘낮술’이란 제목을 붙여보았다. 열하에서 객기를 부리며 호탕하게 낯술을 들이켜는 조선의 나그네, 그 허와 실이 보인다. 어쩌면 조선의 얼굴일지 모른다. 건륭황제 대궐의 지척지간에서 컬컬하게 주욱 보시기를 비운 것이다.

◆ 필자는 ‘태학유관록’ 일기 가운데 ‘낮 술’과 같은 명문을 또 한 편 떼어낼 수 있었다. 연암이 열하에 도착한 날 밤 일이다. 달빛이 쌓이도록 교교한 밤이었다. 윤가전과 기풍액을 만나자 말문이 열렸다. 첫날부터 중국의 ‘시종(詩綜)’에 실려 있는 조선 시인의 작품을 토론하다 보니 어느덧 초경이었다. 태학에 돌아왔을 땐 일행이 모두 잠들어 있었다. 달빛 아래 낙타 울음이 들리고. 제독과 통관 무리는 탁자를 침상 삼아 깊은 잠에 빠졌는데 우악스레 코를 골기가 천둥소리요, 쏴 물병을 쏟아내는 소리였다. 연암은 그 광경을 이렇게 적었다.

◆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오니 개소리가 표범 소리처럼 장군부에서 들려왔다. 이경을 알리는 조두(?斗) 소리가 마치 소쩍새 울음 같았다. 나는 마당을 아장아장 거닐고 달리기도 하면서 그림자를 희롱했다. 명륜당 뒤뜰의 고목은 침침한데 방울방울 이슬에 아롱아롱 구슬들이 달빛에 반짝거렸다. 담 밖에는 삼경 두점의 조두. 이렇게 좋은 밤, 밝은 달을 함께할 사람 없어라. 이 밤 왜 우리 사람들만 쿨쿨 잠 속에 빠졌는가.”

◆ 열하에 왔건만 일행이 모두 고꾸라져, 흥분을 나눌 길이 없다. 이룬 자의 환희와 고독이 엄습해온 것이다. 필자는 시험 삼아 이 400여 자의 글에 ‘달밤’이라고 제목을 붙여보았다. ‘낮술’이 풍자라면 ‘달밤’은 서정이다. 하나가 자기 희화화라면 나머지 하나는 자기 고백이었다. 모두가 주옥같은 소품이다.

◆ 위의 두 편은 필자가 마름질한 수필인데 반해 당초 연암이 독립 집필한 것으로 ‘환희기(幻戱記)’가 있다. 8월10일부터 태학관에 머무는 동안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 밑에서 몇 차례 구경한 요술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열하일기’ 총 26편 중 한 편이면서, 그 소재가 요술 한 가지만 세심하게 관찰한 전제(專題) 수필이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요술을 조선 사람에게 알리겠다는 취지로 쓴 르포지만 그 기록과 묘사의 재주는 요술보다 더 오묘스럽다. 빈 손바닥을 비비면서 별의별 것을 만들다가 그것들이 손바닥 속으로 사라지는 요술을 얘기하는가 하면, 시퍼런 칼을 입으로 삼킨 뒤 두꺼비처럼 불룩거리는 배에서 다시 꺼내는데 그 칼끝에 묻은 핏방울에서 무럭무럭 김이 나더라고 했다. 연암이 ‘환희기’ 한 편에 기록한 요술만도 족히 스무 가지가 넘는다.

◆ 이른 아침 마침내 열하에 도착했다. 연암은 숙소가 태학관이라 했다. 필자는 마치 성지 순례하는 신도처럼 연암이 1주 머물렀던 그 객사를 찾는 데 진력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조급증은 빗나갔다. 현지 안내원에게 태학을 물었지만 모른다고 했다. 2차 답사를 마치고서야 그 이름이 ‘태학’이 아니라 ‘부학(府學)’임을 알았다. 연암이 태학으로 호칭한 ‘부학’은 지방의 학문을 육성하고 지방 서생을 교육하는 기구로 건륭 43년(1778)에 승덕부(承德府)의 문묘(文廟) 옆에 설치됐다. 그 정식 명칭은 승덕부부학이지만 그 역할은 태학과 같았다. 다만 태학은 중앙에 두었을 뿐이다. 연암이 태학으로 호칭한 까닭과 현지 사람이 태학을 모르는 까닭을 그제야 알아챘다.

◆ 필자는 8월11일, 세 번째로 열하를 답습하곤 열하 문물국(文物國)의 소장과 함께 부학을 확인했다. 올해 봄까지 승덕 제8중학교가 있던 자리다. 이사를 마친 뒤라 적적한 운동장만 휑뎅그렁했다. 그 문에는 아직도 조벽(照壁)이 낡은 채 서 있고 문묘는 중앙에 위치해 공자를 배향했다. 그 서쪽으로 부학, 동쪽으로 공자 배향 준비 부서인 희생정(犧牲亭)과 신주(神廚), 신고(神庫) 등이 모여 있다. 부학은 맨 위쪽에 명륜당(明倫堂), 명륜당에는 교수서(敎授署)를 두었다. 그리고 당 앞에는 진덕, 일신, 수업, 시습(時習) 등의 재방을 열립했는데, 생원들이 공부하고 교수가 강학하는 곳이다. 재방 좌우에는 재실을 줄줄이 세워 숙소로 쓰게 되어 있었다. 그곳이 바로 조선 사절과 연암이 기숙했던 곳이다.

◆ 연암이 열하에 도착한 날 밤, 잠 못 이루고 혼자 배회하고 달리기도 한 곳이 바로 명륜당과 그 앞의 재실이다. 그곳은 대체로 옛모습을 지녔다. 특히 명륜당의 지붕과 뜨락의 고목, 그리고 재실의 기와와 벽돌담은 200년 풍우를 견디고 있었다.

◆ 부학에서 나와 피서산장 정문 쪽으로 100m쯤에 광피사표의 패루가 울긋불긋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지금도 승덕에는 패루 세 개가 서 있는데 연암이 ‘환희기’를 썼던 패루는 문묘 쪽 패루가 아닐까 짐작된다.

◆ 필자는 연암의 발자취를 따라 230년 전의 그림자를 줍고팠다. 적어도 연암이 기숙했던 곳, 연암이 경축사절을 수행해 건륭으로부터 여지즙을 받아 마신 대궐의 뜨락, 그리고 반첸 라마를 예방했던 수미복수묘(須彌福壽廟) 세 군데에 내 발자욱을 남겨야 했다. [참조 : 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 사진 : 새로 복원된 열하문묘(热河文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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