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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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광 장군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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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
    현지어
  • 李红光故居遗址纪念碑
  • lǐ hóng guāng gù jū yí zhǐ jì niàn bēi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지린 쓰핑 이퉁 만족자치현 地局子村流沙咀子屯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635.6km
◆ 이홍광은 망국의 해인 1910년 경기도 용인에서 가난한 농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가난과 핍박에서 벗어나려고 1926년 지린성 이퉁현으로 이주했다. 1930년 중국공산당에 들어간 그는 1931년 7월 대원 7명으로 구성된 적위대를 꾸려 대장이 되고 농민운동과 항일투쟁을 이끌게 된다. 적위대의 별칭은 ‘친일파(개)를 때려잡는다’는 뜻의 ‘개잡이대’(타구대)다. ‘개잡이대’는 남만주 최초의 항일유격대인 반석유격대로 발전한다. 1933년 9월에는 중국인 양징위(楊靖宇)와 함께 300여명 규모의 동북인민혁명군 1군을 만들어 찐장이 됐고, 이듬해 11월 동북인민혁명군 1군이 2개 사로 재편될 때 1사 사장에 올랐다.

◆ 그의 신출귀몰하고 배포 큰 ‘기만전술’은 만주 항일투쟁사의 장쾌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1934년 봄 이홍광은 양징위와 함께 200여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류허(柳河)현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 1만2천여명의 포위공격을 받게 된다. 이홍광은 예전에 탈취한 일본군복을 부하들에게 입혀, 새롭게 보충된 일본군 부대로 속여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일본군 부대와 교차하는 순간에는 기습공격을 감행해 2개 소대를 섬멸했다. 이어 식품과 탄약을 싣고 가던 일본군 차량을 세운 뒤 “왜 이리 보급이 늦냐”고 호통을 친 뒤 군수품을 가로채기도 했다.

◆ 이홍광의 두드러진 활약 중 하나는 평안북도 후창군 진공작전이다. 1934년 12월과 1935년 1월 이홍광은 200여명의 기마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북 후창군(현 김형직군) 하성읍과 동흥성을 습격한다. 작전이 얼마나 신출귀몰했던지, <동아일보> 등은 “이홍광은 약관의 여비적(여자 도적)”이라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차오원치 부이사장은 “교전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일본 불패 신화’에 타격을 줬다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 이홍광은 1935년 5월 환런현과 신빈현 경계인 라오링(老嶺) 부근에서 200여명의 부하들과 행군하던 중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만나 교전을 벌이다 가슴에 총탄을 맞았다. 부하들은 끝내 적을 물리치고 그를 후방으로 후송했지만, 이내 숨이 멎었다. 그의 나이 25살 때였다.

◆ 현재 남만주 일대에는 그의 짧지만 의미있는 생애를 기리는 기념물들이 즐비하다. 지린성 판스시 조선족중학교의 이름이 홍광중학교이고, 학교 정면에는 ‘항일 민족영웅 이홍광 장군’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차오원치 부이사장은 “중국에서 그를 소개한 잡지나 논문, 전기가 1천여편에 이른다”고 말했다. 이퉁현과 신빈현에도 이홍광의 기념비와 흉상이 있고, 광복 뒤 조선의용군 1지대는 ‘이홍광지대’로 이름을 바꿨다. ◆ 사진 : 한상권 ◆ 地局子村 근처의 流沙咀子屯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정확한 지점을 아시는 분은 오류수정을 통해서 정밀한 위치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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