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9
  • 언어선택
만해한용운 심우장
+
  • 02-920-3413
1234
    현지어
  • 만해한용운 심우장
  • manhaehanyongun simujang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서울 성북구 성북동 222-1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4.5km
성북동 꼭대기 북향 집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는 문화유산이 많다. 한성대역입구에서 삼청각 방향으로 걷다 보면 길의 좌우로수많은 역사 유적들이 얼굴을 내민다. 최순우옛집,선잠단지, 길상사, 수연산방, 이재준가 등은 그냥지나치기엔 의미가 너무도 각별한 장소다. 그 가운데심우장도 있다. 산동네를 향해 구불구불 올라서야나오는 성북동 끝자락 제일 높은 자리다. 숨을가다듬으며 산길을 오르자니 만해의 검소하며 강직한삶이 느껴지는 듯하다. 심우장은 한용운 선생이 입적한 집이다. 1933년지었는데 만해는 숨을 거둔 1944년까지 이곳에서살았다. 철제 대문 앞에는 심우장(尋牛莊)이라는검은색 목판이 걸렸다. 심우(尋牛)는 불교용어로‘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의미다.목동이 잃어버린 소를 찾듯 스스로의 본성을 찾는다는,선종의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다. 한용운의 아호인목부(牧夫) 또한 같은 의미다. 그에게는 마음에 이르는길이 곧 독립에 이르는 길이었을 것이다. 만해는심우장에서 <심우장 만필> <유마경>을 썼다. 그밖에도독립에 관한 수많은 글을 쓰고 젊은 후배들을 격려했다. 먼저 간 님의 침묵 알려진 대로 심우장은 북향의 한옥이다. 한옥은남향을 기본으로 한다지만 심우장은 그에 반하는북향을 택했다. 이유는 단 하나다. 심우장의 남쪽은조선총독부에 이른다. 만해는 조선총독부와 마주하기싫어 북쪽으로 창을 냈다. 북향의 집임에도 감옥에있는 동지들을 생각해 불을 지피지 않았다니 독립에의의지가 어떠했을까 가히 짐작이 간다. 한때 만해의딸인 한영숙씨가 살았으나 일본대사관저가 들어선 후심우장은 만해사상연구회에 기증됐다. 현재는 서울시기념물로 지정해 그 의미를 기리고 있다. 심우장은 화려한 한옥은 아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단출한 구조다. 이 또한 벽산 김적음 스님과 만해의지인과 후학들이 십시일반해 건넨 것이다. 마당 한쪽의붉은 벽돌집은 후에 지어진 것으로 관리동으로 쓰인다.실내는 한용운 선생의 소박한 박물관으로 꾸몄다.생전에 쓰던 글과 유품, 맘에 품고 살던 독립의 의지를담은 문구가 보관되어 있다. 서재로 쓰이던 공간에는그의 영정 사진이 있다. 그 아래는 그를 존경하는후손들이 피운 향과 재의 흔적이다. 담장 너머바깥으로는 성북동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독립된땅에서야 비로소 남쪽을 향하는, 후손들을 살피는만해의 시선이 느껴진다. 죽은 이는 말이 없다 했나,반세기 전 숨을 거둔 만해는 그저 침묵한다. 뒤를돌아보니 독립운동가 오세창이 썼다는심우장(尋牛莊)이라는 세 글자만이 또렷하다. * 북향으로 지어진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부엌에서 바라본 대청과 만해의 서재*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현판은 독립운동가 위창 오세창이 썼다.* 만해 한용운과 심우장의 유래에 대한 안내판* 가파른 언덕배기에 있지만 만해를 찾는 이들의 걸음은 끊이지 않는다.* 전시실로 쓰이고 있는 심우장 대청* 심우장 서재에 있는 만해의 영정과 분향소* 심우장 부엌 찬마루에 있는 독립선언서 작성 모습만해 | 문화재 | 유적지 | 독립운동 | 성북동 | 한용운 |심우장 | cdvS0000700&menucdv01050900&callValueE0331008&contseqn98공간개요 만해 한용운 선생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집으로 이곳에서 등을 집필했다. 만해가 조선총독부를 마주하기 싫어 집을 북향으로 지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 후 그의 외동딸이 살았으나 성북동에 일본대사관저가 들어서자 그녀 또한 이를 마주하기 싫다 하여 거처를 옮겼다. 집 안에는 만해의 영정과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오세창이 쓴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현판과 만해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도 잘 알려져 있다.유적지 지정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지정 내역 1985년 7월 5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이 지은 집이다. 남향을 선호하는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인데 독립운동가였던 그가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이를 거부하고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일관했던 한용운은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왼쪽에 걸린 현판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1864~1953)이 쓴 것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장방형 평면에 팔작지붕을 올린 민도리 소로수장집으로 한용운이 쓰던 방에는 그의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 공판 기록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만해가 죽은 뒤에는 외동딸 한영숙이 살았는데 일본대사관저가 이곳 건너편에 자리 잡자 명륜동으로 이사를 하고 심우장은 만해의 사상연구소로 사용하였다.관리기관 성북구청관광팁 심우장의 향나무 마당 한쪽에는 커다란 향나무 한 그루가 섰다. 입구의 소나무와 더불어 성북구의 보호수다. 평범해 보이지만 만해의 손길이 닿은 생명이다. 만해는 심우장을 지은 후에 향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바깥 세상과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다.
주변뉴스
< 1/2 >
주변포토
< 1/2 >
동종 정보 [내위치에서 4.5km]
실시간 관심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