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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거처, 심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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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한용운 거처, 심우장
  • Manhae Han Yongun Simwoojang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서울 성북구 성북동 성북로29길 24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4.5km
지금부터 60여 년 전의 경성부 성북정은 오늘날의 성북동과 달리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숲이 깊고 오가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곳이었다. 바로 앞에 혜화문 안에 번화한 거리가 있었으나 이곳은 너무나도 외지고 깊은 골짜기였다.
이 성북동 산기슭에 조그만 한옥이 있었다. 바로 심우장이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 스님이 인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다. 이곳은 1933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지은 집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고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서재로 쓰던 우측 방에 걸려 있는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편액의 ‘심우’는 ‘소를 찾는다.’라는 뜻으로, 수행자가 도(깨달음)를 구하는 과정을 소를 찾아 돌아다니다 마침내 불성을 깨닫는 과정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용운은 조선 말기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홍주 땅[지금의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결성면 만해로 318번길 83)]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유천(裕天)이었다. 유천은 6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시작하여 9살이 되던 해에 『서상기』와 『통감』을 독파하고, 『서경』에도 능통할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
한때 만주 간도성 등을 다니며 광복운동을 하다가, 1905년(광무 9)에 강원도 인제에 있는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1905년 1월 26일 백담사 연곡 스님을 은사로, 영제 스님을 계사로 하여 수계를 하였는데, 이때 받은 계명이 봉완,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였다.
1910년 일제가 강제로 우리나라 주권을 빼앗은 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사찰을 모두 일본 조동종의 관리 아래 두려고 하는 등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화 하려 하였다. 이에 맞서 만해, 만공 스님 등이 대항하였지만, 총독부가 “모든 사찰의 주지와 재산에 관한 권한은 총독이 가진다.”라는 내용의 「조선사찰령」을 반포하였다. 이에 30본산이 모두 총독의 손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만해는 국경을 넘어 만주로 발길을 돌렸다.
중국으로 건너간 만해는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하여 격려하고, 만주와 시베리아 등을 돌아다니다 1913년 귀국하여 불교학원에서 강의를 하며 지냈다. 그러나 불교계의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다시 백담사로 들어간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을 1913년 5월 25일 불교서관에서 발행하였다. 이 유신론에서 “유신운동의 기본적인 목표와 방향이 정신문화의 혁명에 있다.”라고 주장한 그는 불교인이건 아니건 인간에게는 누구나 정신을 새롭게 해야 하며 그 길만이 조선이 살 길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만해는 불교 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한 작업으로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팔만대장경을 모두 살펴보면서 『불교대전』을 편찬하였다. 『불교대전』은 예전부터 내려오던 장경 위주의 편찬 방법에서 벗어나 주제별로 엮어진 최초의 책이었다. 이후 1916년부터는 서울의 계동에서 월간지 『유심』을 발간하여 민중계몽운동에 앞장서는데 힘썼고, 계속 서울에 머물면서 문화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 광복의 기운이 높아가고 있던 1919년 2월 24일 만해는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과 만나 최린(崔麟)으로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이 계획에 적극참여하기로 하였으며, 최남선(崔南善)이 처음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들을 검토하였다. 또 경남 합천 해인사 백용성 스님에게 이 계획을 알려 불교도로서 적극 참여할 것을 부탁하여 민족대표로 함께 참여하겠다는 허락을 받았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29명의 민족대표(원래는 33인이었으나 4명은 지방에 살아 참석 못함)를 대표하여 만해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함께 만세 삼창을 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미리 연락받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민족대표는 모두 체포되었는데, 만해는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만해는 계속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여 1923년 2월에는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였고, 교육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그해 4월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을 보탰으며,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 중앙집행위원 및 경성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만해는 불교계를 중심으로 한 사회개혁운동에도 힘써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바꿔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으며, 그해 월간지 『불교』를 넘겨받아 많은 글을 발표하면서 불교를 대중화하고 항일 독립투쟁 사상을 심어주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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