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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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길과 진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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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중구 명동2가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4km
** 길이름 유래 : 원래 ‘명동(明洞)’이란 지명은 조선 초 한성부의 행정구역 설정 당시 ‘남부 명례방(南部 明禮坊)’이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명례방골’ 등으로 부르다가 ‘명동’이 되었다.

** 스토리 : 해가 기울고 어스름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어디에 있다가들 모여드는지 문화예술인들은 어미 새가 있는 둥지를 찾아드는 새끼 새들처럼 은성으로 찾아든다. 볼 것도 없는 누추한 선술집, 긴 나무 탁자에 사기그릇 대폿잔. 깨진 유리창, 안주라야 빈대떡과 마른 명태 그리고 김치뿐인 이곳이 무에 그리 좋다고 꾸역꾸역 찾아드는 지.......철철 넘치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그들은 아름다운 시를 쓰고 그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른다.

1956년 3월13일

오늘 너무 슬프고 멋진 노래 하나가 탄생했다.

술이 거나해진 이진섭과 박인환이 나애심에게 노래를 한 곡 부르라고 졸랐다. 언론인 송지영과 함께 앉아 있던 나애심은 마땅히 부를 노래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박인환 시인이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내어 긁적긁적 시를 적어 이진섭에게 내밀었다.

“야, 시 좋은데......”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이렇게 시작되는 그 시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그 무엇이 있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나는 그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네.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그 옆에 앉았던 작곡가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붙여 손가락을 튕기며 노래를 흥얼거리자 나애심도 따라 불렀다. 나는 그들이 흥얼거리는 노래를 들으며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느낌을 받았다. 꼭 내 심정을 대변하는 노래 같았다. 송지영과 나애심이 가고 테너 임만섭과 소설가 이봉구와 합석한 박인환, 이진섭은 방금 만들어진 악보를 임만섭에게 보여주었다. 임만섭이 악보를 보고 몇 번 콧노래를 부르더니 잠시 후 풍부한 성량의 미성으로 그 노래를 멋지게 불러 젖혔다. 은성에 모인 사람들이 대화를 중단하고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주점의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그 노래 가사도 곡도 어찌나 가슴이 찡하던지 나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한 두 시간 만에 성사된 일이었다.

“그 노래 눈물 난다. 인환이 나보고 어쩌라고 그런 가사를 지었나?”

나는 눈물을 찍어내며 인환의 어깨를 한 대 쳤다. 그 말에 기분 좋아진 인환이 ‘술 좀 줘.’하고 으스댄다.

“또 외상이가?”

나는 눈을 흘기며 찌그러진 주전자를 빼앗아 철철 넘치게 한 주전자 가져다주었다.

“명태 좀 내와.”

박인환은 제 집 마누라한테 하듯 소리쳤다.

“돈 없어 못 살겠다. 정말. 인환이 너 앞으로는 그 노래 부르지 마라.”

나는 심부름 하는 아이한테 나가서 ‘명태 좋은 놈으로 두 마리만 사 오라’고 시켰다.

정말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그렇게 즉흥적으로 그런 시와 그런 곡을 지어낼 수 있단 말인가. 오래오래 사랑 받을 노래인 것 같다.

1956년 3월 22일

그제 박인환이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나도 심장마비가 걸리는 줄 알았다.

며칠 전 3월 17일 ‘이상 추모의 밤’ 행사 때문에 문인들끼리 모여 준비한다고 바쁜 모습을 보았는데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린지 모르겠다. 매일 마시는 술이기는 하지만 인환이 요 며칠 유독 많이 취해서 밤늦게 은성을 다녀갔다. 행사 날도 이봉구, 이진섭, 원규홍과 함께 취하도록 마셨고 그제도 많이 취해 일찍 집으로 들어갔다는데 저녁 8시 20분 경 옆으로 누운 채 죽었단다. 겨우 서른 살인데 그 아름다운 청년을 왜 이리도 일찍 데려가시는지 하늘이 원망스럽다. 같이 어울리던 예술인들이 나를 붙잡고 대성통곡을 했다. 명동 백작 이봉구가 박인환을 염하기 전에 ‘그리도 좋아하던 술 한 잔 먹고 가라.’며 그의 입에 위스키 한 잔을 부어주었다는 소리를 듣고 나 역시 목 놓아 울었다. 17일 이상의 추모 행사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계속 술을 마시며 취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시처럼 술병이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싶었던 것 같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다시 읊으며 이미 인환은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혹시 술 때문은 아닌가 싶어서 주점 문을 닫고 싶은 심정이다.

1960년 2월 7일

오늘 대학 합격했다고 신이 나서 어미를 찾아온 영한(최불암)이 변영로 선생한테 뺨을 맞았다. 금쪽같은 내 아들의 뺨을 때린 변선생이 섭섭했지만 평소 존경하던 선생한테 따지고 덤빌 수도 없어 애매한 영한이만 호되게 야단을 치는 수밖에 없었다.

“너는 어른 앞에서 무슨 짓을 했기에 변선생님이 이렇게 노하신 거고? 어서 죄송하다는 말씀 드려라.”

“막걸리 잔에 술지게미가 붙어서 그걸 털어내려 했는데.......”

어미 말이라면 껌벅 죽는 순진하고 착한 영한이가 무안해서 어쩔 줄 모르며 웅얼웅얼 변명을 늘어놓다가 또 나한테 혼이 났다. 알고 보니 대학 합격 축하주를 건네던 변선생은 영한이 술지게미를 털어내려고 잔을 털자 ‘버릇없는 놈’이라고 뺨을 올려붙였던 것이다. 워낙 깐깐하고 불같은 성격이던 선생이니 그럴 만도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아들 뺨까지 때릴 일은 아닌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왜 그랬는지 영한의 설명을 들은 변선생이 다시 술 한 잔을 권하면서 기분을 풀고 마무리 되었지만 술장사하는 어미 때문에 아들이 무시당한 것 같아 좀은 서럽다.

1965년 1월 10일

화창한 일요일 아침을 음미할 겨를도 없이 비보가 날아들었다. 어제 이호철, 김승옥 그리고 몇몇 문인들과 술잔을 기울이다가 돌아간 전혜린이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숨졌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 어떻게 해.’ 나는 전혜린이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는 소리를 들으며 내내 그 말만 되풀이 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거야? 잠이 안 와서 자꾸 수면제를 주워 먹다가 과용한 거야?”

비보를 알려준 사람에게 급히 질문해놓고 나는 스스로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유서가 없다는데 누군들 그 속을 알겠는가. 전혜린만이 알 일인 것을. 그러나 우리 모두는 말하지 않는 가운데 그녀의 죽음을 짐작했다. 혜린이 긁적거린 유서 같은 시 구절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술 몇 잔에 취한 얼굴 괴로워지거든 어느 일요일에 죽어 버리자.’

일요일에 숨진 전혜린의 죽음이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섬뜩했다. 부족할 것 없는 명석한 머리와 학벌, 특별한 무엇인가가 되고 싶어 하던 그 열정도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한 모양이다. 나같이 외롭고 힘든 사람도 하루하루 감사하고 행복해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 젊고 멋진 혜린이가 왜? 만 서른한 살의 꽃 같은 나이가 너무 아깝다. 살고 죽는 날이 하루 차이라는 것이 새삼 두렵다.

4년 전에는 수주 변영로 선생이, 2년 전에는 공초 오상순 선생이 가셨다. 경우에 틀린 꼴은 그냥 넘기지 못하는 까다로운 변선생도, 하루에 담배 200개비는 있어야 안심이 된다면서 하루 종일 입에 담배를 물고 살던 공초 오상순 선생도 다 60세를 넘겨 가셨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데 서른 갓 넘기고 가다니 너무 허무하다. 담배 연기 자욱한 초라한 통나무 선술집도 전혜린이 앉아 있으면 어떤 카페보다 멋져 보이던 분위기 메이커 전혜린. 막걸리가 한 잔, 한 잔 늘어나 술기운이 돌수록 점점 더 말이 없어지던 혜린의 술버릇이 나는 항상 마음에 걸렸다.

많은 문인들은 그녀가 번역가에 그치지 않고 수필가에 머물지 않고 문학사에 남을 불후의 명작을 쓸 작가로 대성할 거라는 기대를 걸었었는데 아무 말도 없이 가버렸구나. 목마를 타고 떠난 박인환의 나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에 나는 그만 목이 메었다. 그가 갔을 때도 이렇게 안타까웠다. 인환이 간지 벌써 10년 세월이 가까워지는데도 그때의 심정이 생생하다.

1972년 12월 31일

금년 한 해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남들은 새해에 희망을 말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느라 들떠 있지만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다. 오늘까지는 결정을 지을 생각이었는데 정겨운 단골 예술인들과 송년회를 하고 나니 또 마음이 흔들린다. ‘술은 마음의 문을 열어주고 커피는 대화를 이어준다.’며 돈보다는 예술가들 만나는 즐거움이 커서 시작했던 은성주점. 어언 20년이 되었다. 영화 제작자이던 남편을 서른 살 어린 나이에 사별한 뒤 나는 외로움도 달랠 겸 돈도 벌 겸 인천에 뮤직홀 ‘등대’를 시작했었다. 그곳에서 경험이 쌓이자 나는 용기를 내어 서울로 왔고 명동에 은성주점을 열었었다. 사람이 좋고 예술가가 좋아 무작정 퍼주며 살다 보니 적자가 누적되었다. 항상 벅적벅적 손님이 많아 돈 잘 버는 술집 같았지만 단골들 중에는 술 값 내고 가는 사람보다 외상 달고 가는 사람이 더 많은 형편이었다. 술값은 단골들이 알아서 주는 대로 받았고 외상값은 달라는 말도 해 본 적이 없으니 적자가 날 수밖에. 그나마 집세가 싼 덕에 그럭저럭 현상 유지는 했지만 내년부터는 집세를 올려달란다. 명동에도 이제 개발 붐이 불어 땅값이 몇 배는 올라 집세를 더 달라는 말도 무리한 요구는 아니다. 몸은 몸대로 고달프고 적자를 메울 길이 없으니 문을 닫는 것이 나을 판이다. 답답한 마음에 외상 장부를 꺼내본다. 20년 동안 쌓아온 외상 장부가 커다란 궤짝 2개는 거뜬히 될 듯싶다. 장부를 들춘다. 다들 유명 인사들이라 혹 누가 보더라도 이름을 알까봐 나만 알고 있는 별명으로 바꾸어 적어 놓았다. 골초, 울보, 고래, 망태기.......하는 식이었다. 나는 그들이 누군지 알지만 남들은 장부를 보아도 누군지 알지 못할 것이다. 장부를 넘겨봐도 외상값을 달라고 할 만한 인사가 없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장부를 덮고 박스 안에 도로 주워 담았다. 다들 춥고 배고픈 예술가들이거나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겨우 식구들 입에 풀칠이나 하는 언론인임을 뻔히 아는데 어떻게 술값 달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결심을 굳힌다. 문을 닫자. 세상은 바뀌는 것이다. 이 일대가 비만 오면 진흙 구덩이였던 시절이 있어 ‘진고개’였다가 일본 상가와 음식점이 들어서는 번화가로 변했듯이 이제 명동은 또 다시 바뀔 시점이 된 것이다. 신세대들이 신식 문화와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패션의 거리, 유행의 거리로 바뀌어가는 시대의 흐름을 누가 막을 것이냐. 국립극장도 금융기관에 매각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퇴락해가는 예술가들도 이 거리를 떠날 때가 다가온 것이다.

1973년 1월 5일

신년 며칠은 말을 참았다가 오늘 나는 은성주점 문을 닫아야겠다고 단골들한테 선포했다. 모두들 ‘왜?’냐고 물었다. ‘더 이상 적자를 감당할 능력이 없어서.’라고 하자 모두들 놀란다.

“이렇게 장사 잘 되는 집이 적자라니요?”

저녁마다 빈자리 없이 벅적거리니 밖에서 보면 장사가 잘 된다고 할 밖에.

“돈 내고 술 먹은 작자 있으면 나와 봐.”

나는 큰소리로 윽박지르며 손님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할 말이 없는 눈치다. ‘그래. 이렇게 끝내는 거다. 그동안 먹고 살았으면 그게 남은 거지.’라고 마음을 굳히고 나니 속이 편하다. 오늘 주점 문 닫는다는 내 말을 듣고 자기네들끼리 십시일반으로 외상값 갚기 운동을 벌이는 눈친데 그 주머니 털어봤자 뻔한 액수일 테고 그 돈 가지고 적자를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임을 나는 안다.

“괜히 쓸데없는 짓들 하지 말고 문 여는 동안 마음 편하게 술이나 마셔.”

집 주인에게도 이미 내 뜻을 통보했으므로 적산가옥인 이 집이 헐릴 날도 머지않았다. 집 헐기 전까지는 나는 아직 은성 대포 집 주인인 것이다. 명동백작"이라는 애칭을 가진 이봉구가 제일 섭섭해 한다. 술을 마셔도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는 그의 깨끗하고 단아한 태도 때문에 ‘명동백작’이라는 애칭이 붙게 된 것이다. 전쟁 이후의 과장된 허무와 절망감에 젖은 문인들의 술자리는 광태나 추태로 얼룩지는 일이 흔했다. 술 마시면 울분을 터뜨리다 싸움질로 변했다. 다만 이봉구가 끼여 있는 술자리는 으레 깨끗하게 끝났다. 그는 술 마시는 동안 세 가지 철칙을 준수하도록 동료 문인들에게 요구했다.

첫째, 술자리에서 정치 얘기를 꺼내지 말 것, 둘째 술자리에 없는 사람 험담하지 말 것, 셋째 술자리에서 돈 꿔달라는 말을 하지 말 것이다. 그는 술을 마시되 한 자리에서 석 잔 이상은 마시지 않았다. 그는 손님도 거의 없는 이른 시각부터 카운터 앞 지정석에 언제나 술집 비품처럼 단정하게 앉아 혼자 술을 마시곤 했다. 이제 그의 모습을 지켜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야말로 나에게는 시원섭섭한 일이다. 주머니는 비고 머리와 가슴만 절절 끓는 그들 꼴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 일은 시원하고 인간적인 그 정겨운 사람들을 끌어안아 줄 수 없다는 일은 섭섭하다. 어디 가서 눈치 안보고 또 외상술을 얻어 마시려는지 걱정이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다들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 1950년대에 명동은 문화예술인의 거리였고 6.25 전쟁으로 죽음이 휩쓸고 간 가슴의 한을 풀어내는 곳이었다. 그들은 그 갈증을 적실 술 한 잔이 필요했다. 주머니는 비고 술은 고팠다. 이때 배고픈 예술인들에게 외상이라는 이름으로 인심 좋게 철철 넘치는 막걸리 한잔을 내어주던 은성주점이 있어 그들은 명동에 존재할 수 있었다. 실지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근거로 뒷전에 감춰진 채 드러나지 않았음직한 내용을 나름대로 상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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