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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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례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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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
    주소
  • 서울 중구 명동2가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5km
** 길이름 유래 : 명례방은 조선시대 한성 5부에 속하는 남부 11방(坊)의 하나로, 남산 아래에 있던 여러 마을과 지금의 을지로 입구에서 명동성당 부근까지를 포함하는 구역 명칭이었으며, 김범우(金範禹 : 토마스)의 집은 명례방의 장악원(掌樂院 : 궁중 음악을 관장하던 관청) 앞에 있었다.

** 스토리 :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 말했다.

“오늘은 조선 명례방 공동체의 영혼들을 만나보실 차례입니다.”

전능하신 천주성부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께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번 주간 예수께서는 평생 동안 한결 같은 믿음으로 살다가 천국에 온 영혼들을 둘러보시는 중이었다.

“명례방 공동체는 조선의 한성부 명례방에서 형성되었던 공동체라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간단한 설명을 마치자 곧 영혼 하나가 예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찬미예수. 저는 명례방 공동체의 김범우 토마스라 하옵니다.”

“오, 너는 나의 증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조선에서 처음으로 죽임을 당한 이가 아니냐. 박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너의 믿음을 자신 있게 말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였구나. 그런 너의 행실이 빛나 너의 집이었던 곳은 현재 명동성당이 되어 한국 천주교의 총본산이 되고 있다. 자, 너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거라.”

“저는 역관 김의서의 아들로 태어나 영조 때인 1773년 역과에 합격했으며, 종6품의 벼슬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저는 재주가 많음에도 중인의 신분으로서 더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없는 것에 세상을 원망했었습니다. 양반 이벽이라는 이와 가까이 지냈는데, 그가 서학(西學)에 대해서 저에게 처음으로 말해주었습니다. 서학에서 가르치기를 세상의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하였다는 것을 들으니 저의 원망하던 마음에 위안이 되었습니다. 역관이다 보니 청나라 사신들을 통해 책을 구할 수가 있어 서학관련 책들을 구해 읽었습니다. 그때부터 주님을 마음에 모시게 되어 이승훈에게 영세를 받았으며, 저의 집을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다른 신자들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정조 때인 1785년 어느 봄날 저는 이승훈, 정약용 3형제 등 양반들과 중인 신자 수십 명과 함께 이벽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마침 제 집 앞을 지나던 형조의 관원이 도박장으로 의심하고 수색하였습니다. 형조판서는 사대부 자제들은 타일러서 집으로 돌려보내고, 중인 신분인 저는 잡아 가두었습니다. 판서가 천주교를 믿느냐고 묻기에 ‘서학에는 좋은 곳이 많다. 잘못된 점은 모른다.’고 대답하여 고문을 받고 단양으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 죽음으로 이렇게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중인이었기 때문에 제가 먼저 천국에 들었으니 이제는 오히려 양반이 아니었던 것이 감사할 다름입니다.”

“과연 그렇다. 이제는 네가 낮은 신분이었던 것에 오히려 감사한다니 너는 그로인해 이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으리라.”

예수께서는 김범우의 이마를 쓰다듬어 축복을 내리시고 다른 곳을 돌아보았다.

다른 이가 와서 무릎을 꿇었다.

“찬미예수. 저는 명례방 공동체의 이승훈 베드로라 하옵니다.”

“오, 너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영세를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말을 전한 이가 아니냐. 청나라까지 가서 영세를 받고 조선으로 돌아와 사제대행권자로서 다른 이들에게 영세를 주었으니 너 한 사람이 바로 교회가 된 것이다. 훌륭한 일을 행하였구나. 자, 너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거라.”

“저는 꽤 유력한 남인 집안에서 태어나 정조 때인 1780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수학을 배우려는 마음으로 외국인 선교사를 만났으나 서학을 알고 주님을 마음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갔다가 그곳에서 루이 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고 조선에 돌아와서는 사제대행권자로서 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정했습니다. 한번은 형조에 적발되어 체포되었을 때, 가족들의 권유로 배교(背敎)한 것입니다. 얼마 후 다시 복교(復敎)하여 자치적으로 교회활동을 개시했지만 제사를 거부한 문제로 옥에 갇혔을 때 두 번째로 배교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1801년 신유박해로 의금부에서 취조를 받을 때였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고 죽음을 받아들여 영원히 삶을 택하였습니다. 세 번이나 주님을 부정한 죄를 저질렀지만 성서에 나오는 베드로와 같이 이 일이 귀감이 되어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가 순교한 데 이어 증손자 연구와 균구가 순교하여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낸 집안이 되었으니 오히려 저의 허물을 주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드립니다.”

“과연 그렇다. 네가 나를 부정하였던 허물을 오히려 세상에 밝혀서 사람들이 본보기로 삼게 한 일에 감사한다니 너는 그로인해 이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으리라.”

예수께서는 이승훈의 이마를 쓰다듬어 축복을 내리시고 다른 곳을 돌아보았다.

다른 이가 와서 무릎을 꿇었다.

“찬미예수. 저는 명례방 공동체의 이벽 세례자 요한이라 하옵니다.”

“오, 너는 새로운 사상에 목말라있던 조선 선비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되, 살아서는 입으로 전하고 죽어서는 너의 책을 통해 전했던 이가 아니냐. 너 혼자만 구원을 받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영혼들을 함께 구원하고자 하였으니 훌륭하다. 자, 너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거라.”

“저는 무반으로 이름 높은 가문의 후손으로, 신자였던 다산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처남이 됩니다. 무반으로 출세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소원을 뿌리쳤으며, 문신으로도 진출하지 않고 포의서생(布衣書生)으로 생애를 마쳤습니다. 이른 시기부터 주자학의 모순과 당시의 유교적 지도이념이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아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던 중, 사신들을 통하여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서학서(西學書)를 접하게 되어 제 안에 주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정조 때인 1779년에는 기호 지방의 남인학자들과 실학적인 인식을 같이 하여 새로운 윤리관을 모색하려는 목적의 강학회(講學會)를 열었는데, 이때 저는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동료학자들에게 전하고, 자생적으로 서학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이승훈을 통해 영세를 받고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한편, 교분이 두터운 양반학자와 인척들 및 중인계층의 인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서학을 전파하였습니다. 이때 세례 받은 사람들로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 등 남인 양반학자들과 중인 김범우 등이 있었습니다.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공동체가 해산되었고 그 뒤 천주교신앙에 대한 아버지의 결사적인 반대를 받았습니다. 저는 당시 사회에서는 포기할 수 없었던 효(孝) 사상의 윤리관과 새로운 진리로 체득한 서학사상 중에서 양자택일을 하여야 하는 심각한 갈등 속에서 고뇌하다가 페스트에 걸려 죽음을 맞았습니다. 비록 그 때문에 배교의 오명을 쓰고 있기는 하나, 그것보다는 주님께서 제가 죽기 전 <성교요지 聖敎要旨>라는 저술을 완성하게 허락하시어 후일에 한국천주교가 유례없는 대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된 것에 오히려 감사할 다름입니다.”

“과연 그렇다. 이제는 너의 억울한 사정을 변명하기보다는 네가 쓴 저술이 훗날 많은 이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게 된 것에 감사한다니 참으로 훌륭하다. 너는 그로인해 이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으리라.”

예수께서는 그 후로도 정약전, 정약용 등의 명례방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영혼들을 차례로 돌아보시고 흐뭇해하시며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내 말을 잘 들어라 감사할 줄 아는 이는 행복하다. 너희는 언제나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아는 이가 되어라. 그러면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 명례방 공동체는 비록 을사년에 해체되었지만 그 일원들은 작은 것에도 감사하려고 노력했기에 행복했을 것이다. 천주교뿐만 아니라 어느 종교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명례방길은 걷는 이들은 바로 이 순간만이라도 무엇엔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는 것을 어떨까.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4대문 안 길 이름),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