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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항일 투쟁의 발상지, 법정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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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제주 항일 투쟁의 발상지, 법정사 터
  • Beobjeongsa Temple ruins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제주 서귀포시 도순동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474.4km
왜놈이 우리 조선을 병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병합 후에도 관리는 물론 상인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 동포를 학대하고 있다. 불원 佛務皇帝(불무황제)가 출현하여 국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니 우선 제일로 제주도에 사는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상인들을 도외로 구축하여야 한다.

1918년 9월 법정사(法井寺) 무장항일투쟁의 주도자였던 김연일(金蓮日)이 항쟁의 당위성과 명분, 추진방침 등을 신도들에게 공포한 내용이다. 법정사는 1909년 관음사를 창건한 봉려관과 김석윤이 한라산 남쪽을 대표할 사찰의 필요성을 느끼고 관음사 다음으로 세운 사찰로서, 1911년 9월 좌면 도순리 산 1번지에 창건되었다. 1914년 경북지역에서 김인수·정구용과 함께 항일운동의 이력을 갖고 있던 김연일이 법정사의 주지로 부임하면서 제주 출신 승려 강창규, 방동화 등과 함께 이곳을 대대적인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만들었다. 법정사는 1918년 9월경 곤봉, 화승총, 깃발 등을 준비한 뒤 거사를 지휘할 조직을 구성하였다. 1918년 10월 5일과 6일, 법정사 정기 예불일에 모인 사람들과 7일 새벽, 출정식을 갖고 도순리로 향하였다. 선봉대가 각 마을에서 참여자를 모집하고 영남리, 서호리, 강정리, 호근리를 순회하며 전선과 전주를 절단하였으며, 하원리에 이르러서는 일본인에게 위해를 가하였다. 중문리에 이르렀을 때 인근 마을에서 400명이 동조하여 참여하였다. 주민과 합세하여 힘을 얻은 운동세력은 중문리 경찰관주재소의 기구와 문서 등을 불태웠으며 구금되어 있었던 농민 13명을 석방한 뒤 주재소 건물을 방화하였다. 그러나 항쟁은 총으로 무장한 서귀포 경찰관주재소 기마순사대에 의해 진압되어 제주 전역으로 확산되지 못하였다. 당시 일경에 잡혀 검거된 인원은 66명이었으며,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받은 사람은 31명이었다.


법정사에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투철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창건에 관여한 김석윤은 1877년 제주도 오라리에서 출생하여 1894년 전주 위봉사에서 출가하였다. 그는 단순한 승려가 아니라 서당,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한 지식인이었다. 특히 그는 1909년 3월 제주도에서 의병을 주도한 일로 일제에 잡혀 대구감옥에서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같은 해 7월 제주도로 돌아왔다. 이즈음 김석윤과 같은 고향출신이면서 같은 스승에게 수계를 받은 강창규도 함께 활동하였다.
또 제주 중문면 대포리 출신 방동화는 강창규에게 영향을 받아 1913년 김석윤과 강창규의 스승이 주석하고 있던 기림사에서 출가하였다. 여기서 방동화는 김연일을 만났다. 김연일은 불교에 정통하고 법문에 능하였으며, 특히 동학농민운동 및 의병운동의 경험이 있었다고 하였다. 방동화는 김연일에게 제주도에서의 대중강연을 제시하였고, 이 강연회가 큰 방향을 일으키자 강창규는 김연일이 제주도에서 머무르기를 요청하였다.
법정사에 머물렀던 김석윤, 강창규, 방동화, 김연일 등은 모두 민족의식이 충만하고, 의병 활동 등의 경험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와같은 정서, 배경, 이념이 법정사에 충만하였기에 무장항일투쟁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무렵 제주도민들은 일제의 경제침략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일제가 제주도에서 자행한 토지저당 고리대사업, 토지조사사업, 제주도 일주도로 강제부역 등이 그것이다. 그런 속에서 제주도는 1898년 방성칠난, 1901년 이재수난, 1909년 의병항쟁 등으로 제주도민의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이러한 배경이 항일투쟁 이전의 정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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