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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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사당 및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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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단재 신채호 사당 및 묘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17.3km
신채호는 음식을 배달하는 소년에게 음식 맛이 아주 좋다고 칭찬하고 나서 물었다.

"그런데 이 고기는 무슨 고기이기에 이처럼 맛이 유별나지? 어디서 온 거니?"

"그 고기는 동양어라는 것으로, 일본에서 직접 가져온 희귀한 고기죠."

"뭐라고? 왜놈 음식이라고?"

그는 노발대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길로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음식을 모두 토해 버렸다. 대접한 친구가 도리어 미안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할 정도였다.

토하고 나서야 신채호도 친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미안하네. 하지만 왜놈 고기는 내 위장이 좀처럼 받지 않으니 별 수 없지 않은가."






신채호(申采浩)(1880∼1936)는 한말에서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쳐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언론인, 계몽사상가, 역사연구가로서 활동한 개화기의 지식인이었다. 또한 민족해방을 위한 염원으로 유자명과 함께 1923년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한「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그는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진 독립운동가로서 우리 현대사에 독특한 삶의 자취를 남긴 민족의 선각자이다.


신채호는 본관이 고령이고, 호는 단재이다. 1898년 성균관에 입교하였다가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구한말에는『황성신문』과『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민족의식 고취에 진력하였으며, 신민회·기호흥학회 등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한편『독사신론』,『을지문덕』,『수군 제일위인 이순신전』,『동국거걸 최도통전』,『대동사천년사』등을 저술하여 근대민족사학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1910년 국외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행된 민족지『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4년에는 윤세복이 경영하는 동창학교에서 청소년들의 국사교육을 담당하는 한편,『조선사』를 저술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 모임에 참가하였으나, 그해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에 이승만이 선출되자 분개하여 임시정부와 결별을 선언하고 반임시정부 노선을 취하였다. 10월에는 상하이에서『신대한』을 간행하여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는 언론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0년에는 베이징으로 이동하여 제2회 보합단을 조직하였으며, 1923년에는「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창조파에 가담하였으며,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실망하여 칩거하면서 국사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조선상고문화사』,『조선상고사』,『조선사연구초』등을 집필하였다.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운동에 관심을 갖고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8년 4월에는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하고 그 회의의 결의에 따라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타이완의 가오슝[高雄]에서 활동하다 일제 관헌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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