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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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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박정희대통령묘소
  • Tomb of President Park Chung Hee
    분류
  • 여행/오락 > 여행지
    주소
  •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6.8km
박정희(朴正熙[1],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중수(中樹)이다.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선산군에서 태어나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성적 석차 2등으로 신징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한 후 1944년 성적 석차 1등으로 졸업했다. 만주국 육군 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제가 수립한 만주국의 장교로 근무하였다. 일제가 패망하고 1946년 7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지내며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다가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국에 남조선로동당의 실체를 증언한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의 최종 면담에서 사형을 면하였다.[2][3] 한국 전쟁이 나자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참전하였다.[3][4]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였고, 이로써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독재정치를 시작하였다.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제5·6·7·8·9대 대통령으로 장기집권을 하였다.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던 여야 및 학생운동 세력을 탄압하였다. 1979년 10월 무렵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연회를 하던 도중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쏜 총에 저격당함에 따라 서거했다.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장면내각이 수립한 국가주도 핵심 공업 개발을 골자로 하는 '불균형 개발 모델-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2공화국과 울프박사의 합작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미국이 주문한 환율 현실화 및 노동집약형 수출 경공업 개발을 비교적 충실하게 따랐다는 평가와 무리하고 비효율적인 중공업 중투자 및 지나친 정경유착-관치경제로 인한 금융시장의 부실화로 한국의 경제발전을 늦추었다는 평가가 공존하고 있으나 어느쪽이든 성공적인 혁명이라 볼수는 없다는 데에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이외에도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 발전에 성공했다는 긍정적 평가가와 군정시절 이래로 10년 넘게 지속된 각종 중농정책, 통일벼보급, 새마을운동에도 불구하고 농촌과 농가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으며, 그린벨트 규제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과밀을 예방하지 못했다는 부정적 평가, 의료보험 제도가 오늘날 한국 의료보험의 토대가 된 전두환 정부의 의료보험만 못하다는 부정적 평가, 개발 위주의 획일화된 정책이라는 부정적 평가 등이 뒤따르고 있다. 다만,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에서 꾸준히 실시되었던 부 시절부터 사방사업, 조림 사업, 산림복원사업 등에 관하여는 호평이 더 많은 편이다.[5][6][7]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존경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 선호도와 공적 부문 등에서 최상위평가를 받아오고 있다.[8][9][10] 정치적으로는 5.16 군사 정변, 10월 유신을 통한 헌정 파괴, 노동 운동 및 야당 탄압, 군사독재 등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11] 한일협정을 강행한 것과[12] 베트남 월남전 파병에 대한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13][14] 핵 개발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며,[15]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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