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선양 고궁 전경


만주어로 ‘버드나무 울타리’라는 뜻의 무크덴Mukden으로 불리기도 했다. 선양은 전국시대 때부터 역사에 등장하지만, 청나라의 개국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선양 동쪽의 ‘신빈현’이란 곳에서 청 태조 누르하치(1559~1626)가 태어났고, 이곳이 후금을 세운 곳이다. 누르하치가 죽은 뒤, 그의 넷째 아들 황타이지(皇太极)가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게 되었고, 1635년에 여진 각부의 칭호를 폐지하고 ‘만주’라고 하였다. 다음해 국호를 청 (淸)으로 고쳤으며, 9년 뒤 5월에는 황타이지의 아홉 번째 아들 푸린(福临)이 청조의 3대 황제, 청 세조가 되면서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다.청은 베이징을 통일 제국의 수도로 삼았지만, 선양은 여전히 정신적 수도로 남았다.


청나라가 시작된 역사고도









▲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숭정전(崇政殿)의 화려한 내부

선양에서 가장 가볼 만한 곳은 뭐니뭐니 해도 고궁이다. 선양 고궁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청나라가 시작된 곳으로 베이징 고궁과 함께 중국에 현존하는 2대 궁전으로 손꼽힌다. 1625~35년에 건설된 선양 고궁이 실제로 쓰인 것은 8년 뿐이다.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긴 후 선양고궁은 가끔씩 제사를 위해 방문하는 황제들의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선양 고궁에서는 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황궁 구조를 볼 수 있다. 청 황제가 국사를 논의하던 대정전(大政殿)의 앞뜰에는 만주 8기의 작은 전각이 사열하듯 늘어서 있다. 만주 8기는 만주족의 부족을 대표하는 8개의 군사집단으로, 청이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망할 때까지 청의 정예군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대정전은 ‘2중 8각 지붕’이 특징으로 누각의 형태를 띠고 있다. 전각과 누각을 구분하는 한족은 결코 지을 수 없는 건물 형태로 정면의 두 기둥에는 금장의 용이 금방이라도 기둥을 타고 오를 것만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인상적이다.


선양에는 두개의 황제무덤이 있다.







▲ 청 2대황제 황타이지의 무덤인 베이링

후금의 태조 누르하치의 무덤인 동릉(东陵, 원래이름은 복릉(福陵))과 청 2대 황제 황타이지의 무덤인 베이링(北陵 )이 그것이다. 선양시민들의 휴식처로 황제의 능이라기 보다 공원에 가까운 베이링의 능 입구에는 하마비(下马碑)가 있고 신도(神道)라는 참배로가 이어진다. 신도의 끝은 방성(方城)과 연결되는데, 방성은 황제의 사당을 에워싸고 있는 것으로 황제의 능에만 건설할 수 있다.


혼란스러웠던 근현대사 유적









▲ 멋진 건물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장씨사부

중일전쟁과 관련된 자료를 모아놓은 역사박물관인 9.18사변 박물관. ‘9.18사변’은 한국인에게 ‘만주사변(满洲事变)’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본의 관동군이 중국을 침략하기 위해 1931년 9월 18일 철도폭파사건을 조작한 일을 말한다. 대표적인 친일군벌이었던 장쭤린(张作霖)이 9.18사변으로 사망하고, 일본군은 즉각 친일군벌을 제거하기 위한 국민당 정부의 테러로 규정해 만주일대를 점령해버린다. 아버지의 어이없는 죽음을 본 장쉐량(张学良)은 이후 국민당에 가담해 일본과의 전면전을 주장한다. 선양고궁에서 가까운 곳에 이들 부자의 사저 장씨사부(张氏师府) 가 있다. 이곳에는 장쉐량의 업적을 중심으로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오늘날 중국 정부는 장쉐량을 높이 평가하는데 그가 시안사변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는 상관인 장제스(张介石)를 시안 화청지에 감금하고 울면서 힘을 합쳐 일본을 몰아낼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결국 시안사변으로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어 일본군에 함께 맞서게 된다.


한국 역사 속에 등장하는 선양







▲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의 역사공원에 있는 사적 제 101호
삼전도비, 이 비석에는 치욕의 역사가 묻어있다.


한국 역사 속의 선양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친명배금 정책을 지지하던 인조가 두 차례의 호란을 겪고, 그 아들 소현세자를 선양에 인질로 보내면서 등장한다. 1636년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조선은‘삼전도의 굴욕’-인조가 청태종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세 차례 큰 절을 하고 아홉 차례 머리를 땅에 박았다는 항례(항복의 의식)는 한국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순간이다. 소현세자와 세자빈이 머물렀던 선양의 조선관은 현재, 유적으로 보존되지 못하고 어린이 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다. 선양에서의 오랜 인질 생활을 하는 동안 소현세자는 외국의 선진 문물을 경험하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인조와의 사이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든다.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고 봉림대군(효종)이 왕위에 오른다. 병자호란 후 50만 명에 이르는 조선 민초들이 청나라에 끌려간 것으로 전해진다.


동북아 민족의 솟대 문화...









▲ 선양시정부 광장의 황금색 태양새 조형물

선양고궁의 청녕궁광장에서 가장 흥미있는 볼거리는 바로 우뚝 솟아있는 솟대. 중국인들이나 서양인들은 그저 마당에 꽂혀있는 장대라 생각하겠지만 의미없이 서 있는 것은 아닐터.솟대란 동북아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에게서 볼 수 있는 상징 중 하나로 새가 쉬어갈 수 있게끔 꽂아놓은 장대를 말한다. 동북아 민족이 신성시하는 새는 태양신의 사자였다는 공통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새에 대한 숭배는 한족과 구별되는 동북아 민족의 상징이다. 선양 시정부 관장 한가운데 솟아 있는 태양새 조형물도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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