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경 유리창거리.

▲ 북경 유리창거리.

베이징=고유민·중국여행전문가



이덕형 일행 恨 서린 午門"작은 나라는 못 들어온다"中 관리들에게 끌려나가…

책·신문물의 창구 유리창박지원·홍대용 등이 찾아지금은 고서화·골동품 거리로…


◆조선 사신일행이 묵던 숙소, 회동관



북경지하철 전문역(前門站) A출구로 나와 북쪽으로 걸어가면 오른쪽에 동교민항(東交民巷)이란 조그만 길이 나온다. 이 길로 들어가면 북쪽에 19세기 유럽풍의 건물들이 있고, 프랑스와 일본 등 외국의 대사관 자리였음을 알리는 표지가 있다. 이 동교민항에 조선의 사신 일행이 묵던 숙소가 있다. 회동관 혹은 옥하관이라 불렸던 숙소의 정확한 위치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덕일의 '조선 최대 갑부 역관'(김영사, 2006)에서는 회동관이 동교민항 남쪽의 수도대주점(首都大酒店)이라고 보았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연경성시도'를 보면 내성의 남쪽 중앙에 있는 정양문(正陽門) 안쪽에 사신들의 숙소인 회동관이 있었다는 것이 증거이다. 그러나 김성남의 '이야기로 읽는 한중문화교류사'(프로젝트 409, 2004)에서는 동교민항 북쪽 거리에 위치한 인민최고법원이 원래의 옥하관이라고 주장한다. 이어 러시아 사람들 때문에 남쪽의 공안국 건물로 옮겼다고 한다. 필자가 왕부정(王府井)에 있는 서점에 가서 북경역사지도를 찾아 회동관 혹은 옥하관의 위치를 찾아보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 판첸라마를 위해 지은 승덕의 수미복수지묘.

▲ 판첸라마를 위해 지은 승덕의 수미복수지묘.

 

회동관에 관심이 가는 것은 사신 일행을 따라온 역관과 상인들이 중국인들과 무역을 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동관 무역이라고 한다. 이 무역의 주도권은 중국 상인들이 쥐었다. 조선 역관과 상인들은 사신단이 돌아갈 때까지 물건을 팔아야 했기 때문에 가격 결정권을 가지지 못하고 시간 끌기 작전과 담합으로 나오는 중국 상인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한 방송사가 방영한 '상도(商道)'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의주 만상(灣商) 임상옥(林尙沃·1779~1855)은 중국 상인들의 담합 구조를 깬 인물이었다. 그는 다른 역관과 상인들처럼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자신이 가져간 인삼을 쌓아놓고 불을 질러버렸다. 놀라서 달려온 중국 상인들에게 임상옥은 평소보다 10배나 높은 가격에 판매했다고 한다. 이후 임상옥은 중국 상인들과 앞으로는 적정한 가격에 거래하기로 합의했고, 인삼 무역으로 조선 최고의 거부가 되었다. 회동관 부근의 왕부정은 지금 북경에서도 가장 번화한 상업거리가 되어 있다. 회동관 무역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약소국의 치욕과 비애가 서린 午門



전문에서 북쪽으로 계속 걸으면 현대 중국을 상징하는 천안문을 지나 고궁박물원(자금성)의 남쪽 입구인 오문(午門)에 도착한다. 필자가 지나온 길이 예전에 조선 사신들이 자금성에 들어가기 위해 왔던 바로 그 길이다. 지금은 이곳에 매표소가 있어 입장권만 구입하면 누구나 고궁박물관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사신들은 그렇지 못했다. 1624년 10월 13일부터 1625년 2월 27일까지 북경에 머물렀던 조선 사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국문 사행록인 '죽천행록'을 보면 원래 조선의 사신들은 다른 나라의 사신들처럼 오문 밖에서 조회하였다고 한다. 이때 정사(正使) 죽천(竹泉)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이 "소신의 나라가 본디 예의지방으로 천하에 유명하오니 오랑캐와 한 반열에 서기는 부끄럽사오니 청컨대 오문 안에서 조회하여지이다"라고 주청하여 겨우 황제의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반정(反正)으로 권좌에 오른 인조의 즉위를 승인받기 위해 간 이덕형 일행은 중국 관리들의 횡포에 온갖 수모를 다 겪는다. 이덕형이 차가운 길바닥에 엎드려 중국 고관들에게 만나기를 청하는 장면은 이렇게 묘사돼 있다.



"공이 또 길가에 엎드려 손을 묶어 부비니 모두 불쌍히 여겨 칭찬하기를 '조선에 충신이 있도다' 하고 '내일 도찰원으로 오라' 하거늘, 공이 무수히 사례하고 관에 돌아와 앉아 파루를 기다려 마을 밖에 가 대령하니 춥기가 우리나라에 비하면 더한지라. 사람이 다 떨고 섰더니…."



우여곡절 끝에 고관들을 만나게 되었으나 다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죽천은 섬돌을 붙들고 내쫓기지 않으려 애원하는 장면을 이렇게 기록한다.



"한 대신이 갑자기 소리질러 꾸짖되 '변방 적은 나라 신하가 우리 존위를 범하랴. 들어내치고 문 닫으라.' 공이 울며 빌어가로되 '대저 모든 대인들께선 적선하소서.' 섬돌 붙들고 나오지 않으니…." 오문에서 이 장면을 떠올리자 약소국의 비애가 밀려온다.



또 지하철을 타고 전문역(前門站)에서 서쪽으로 두 정거장을 가면 선무문역(宣武門站)이 있다. 이 역 북쪽의 선무문내대가(宣武門內大街) 동쪽에 남당(南堂)이 있다. 또 북경의 최고 번화가인 왕부정대가(王府井大街)를 따라 북쪽으로 가면 롯데백화점 옆에 동당(東堂)이 보인다. 천주교 성당인 남당과 동당은 1644년 아담 샬과 만난 소현세자를 비롯하여 정두원(1631) 등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들이 자주 찾아갔던 곳이다. 또 이들뿐만 아니라 김창업·이기지(李器之)·홍대용·박지원 등 조선 사신단 일행도 숙소와 가까워 자주 찾아갔다. 공원처럼 바뀌어 관광지 분위기가 나는 동당에 비해 남당은 주차장까지 완비되어 많은 서양인들이 미사를 보는 종교적인 냄새가 난다.














▲ 홍대용이 먼 길을 찾아가 연구했던 북경 관상대.


▲ 홍대용이 먼 길을 찾아가 연구했던 북경 관상대.



 ◆홍대용, 유럽신부 찾아가 천문학 배워



전문역에서 지하철 순환선인 2호선을 타고 동쪽으로 두 정거장을 가면 건국문역(建國門站)이 있다. 이 역의 서남쪽에는 명청시대의 관상대(흠천감·欽天監·이라고 불렸음)가 있다. 명나라와 청나라 황제들은 중국에 천주교를 포교하려고 온 신부들의 과학 지식을 이용하기 위해 이 관상대에서 천문 현상을 관찰하고 역법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게 하였다. 과학에 관심 있던 홍대용은 이곳을 찾아 유럽 신부들에게 끈질기게 질문하고 직접 관찰하면서 천문학 지식을 배웠다. 현재는 빌딩과 도로 사이에 끼여 일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전락한 관상대의 위치를 지도에서 찾아보며, 홍대용이 숙소인 정양문(현재의 전문)에서 북경성의 동남쪽 구석까지 찾아온 정성과 학구열이 느껴져 마음이 숙연해진다.



◆가장 오래된 고서화·골동품 거리 유리창



전문에서 서쪽으로 한 정거장을 가면 화평문역(和平門站)이 있다. 여기서 남쪽으로 남신화가(南新華街)를 따라 걸으면 횡단보도의 동쪽과 서쪽으로 뻗은 거리가 유명한 유리창(琉璃廠)이 있던 곳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원래 유리기와를 만들던 공장이 있던 곳이었으나, 나중에는 책과 문방구를 파는 곳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사신 일행과 수행원들은 이곳에서 새 책을 구입하고 서방에서 들어온 신문물을 접했다. 유리창은 조선 사신과 일행들뿐만 아니라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중국의 문인과 학자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홍대용 등 여러 학자와 관리들이 유리창에서 만난 중국인들과 필담을 나누고 자신들의 시나 문집을 전달해 주는 등 문화교류의 현장이기도 했다. 지금 유리창 거리는 골동품과 고서 거리로 바뀌었다. 북경 시내에서 골동품을 취급하는 곳은 이곳 말고도 몇 군데 더 있지만, 역사가 가장 오래된 유리창 물건이 가장 비싸다. 그래서 중국의 고서화나 골동품에 관심 있는 한국 관광객들은 요즘도 이곳을 찾는다. 하지만 골동을 감별할 능력이 없으면 '짝퉁 대국'인 중국에서 사기당하기 십상이다.



북경의 서북쪽에 위치한 원명원(圓明園)도 조선 사신들이 자주 찾아가야 했던 장소의 하나였다. 원명원은 원래 북경의 서북쪽에 위치한 별궁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과 보물, 유럽 여러 나라의 왕궁을 본떠 만든 서양식 건물, 강남의 정원을 본뜬 정원 등으로 유명하여 유럽 여러 나라의 왕들도 부러워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인들에게 제국주의 서양이 남긴 침략과 파괴를 상징한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가 북경을 점령한 후 이곳을 파괴하고 약탈했기 때문이다. 몇 개의 돌조각만 남은 서양루(西洋樓)는 야만적인 영국과 프랑스 군인들의 분탕질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조선 사신들은 1782년에 처음으로 원명원에서 거행하는 각종 의식과 연회에 참여한 후 매년 중국에 왔던 동지사들은 정월 대보름에 원명원에서 벌어지는 각종 행사에 참석했다. 원명원을 처음으로 언급한 홍대용 이외에도 많은 사신들과 수행원들이 원명원의 모습이나 여기에서 벌어진 각종 축제와 의식을 기록하였다. 이들의 기록이 폐허가 된 원명원의 옛 모습을 복원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니, 우리 조상들의 투철한 기록 정신이 자랑스럽다.













 

◆고려영은 고구려 군영인가 역참인가



북경 동북쪽 순의구(順義區)에 고려영(高麗營)이란 곳이 있다. 고려영은 구체적인 유적지는 남아있지 않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고려영'은 '고려의 군영'이란 뜻이다. 하지만 '고려영'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고려영에 대해 처음으로 주목한 이는 단재 신채호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安市城)에서 막혀 쩔쩔매고 있는 동안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내몽고를 우회하여 지금의 북경지역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고려영은 이때 세운 군영이라는 것이다. 이는 정사에서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주장이지만, 재야사학자들 사이에 호소력을 갖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적은 내용이 주목을 끈다. 박지원은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일찍이 북경의 동악묘(東岳廟)에서 5리 정도에 위치한 황량대(��糧臺)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거짓으로 곡식 창고를 만들어서 적을 속이려고 했다고 기록하였다. 청나라 때 고조우(顧祖禹)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라는 지리서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문제는 왜 당태종이 북경 일대에 고구려를 속이기 위한 군사시설을 만들었느냐는 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당나라와 고구려의 국경선은 요하(遼河) 부근이다. 북경에서 심양까지 700㎞가 넘는 점을 생각하면, 당태종이 왜 고구려를 속이기 위한 위장 시설을 국경에서 한참 먼 곳에 만들었는지가 의문이다. 그래서 고구려의 군대가 북경 부근까지 쳐들어왔기 때문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국내의 한 방송사도 이런 추론을 근거로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있다. 이와 달리 중국인들은 당나라 때 고구려 사신들이 거쳐 가던 역참에 사신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일부 고구려 사람들이 거주하여 고려영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역참이란 말을 갈아타거나 잠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국가에서 만든 교통망이다. 그런데 외국 사람들을 불러다 역참을 관리하도록 했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 게다가 고려영의 위치는 고구려 사신들이 당나라로 가는 교통로라고 보기 어려운 곳에 있다. 중국 쪽의 주장도 신빙성은 떨어진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북경의 동북쪽 군현에 고려장(高麗莊)이란 지명이 많다고 기록했다. 또 '독사방여기요'에도 현재의 북경시 동쪽에 위치한 통현(通縣) 서쪽 12리에 고려장이란 지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북경 동쪽의 영평부(永平府)의 풍윤현(豊潤縣)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고려보(高麗堡)가 있다는 기록도 있다. 이곳에는 병자호란 다음 해인 1637년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이 논농사를 지으며 우리의 풍습을 유지한 채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고려영'은 혹시 몽고인들이 세운 원나라에 끌려갔거나 자발적으로 건너갔던 고려인들이 거주했던 곳이거나, 조선시대에 끌려갔던 사람들이 살았던 곳은 아니었을까? 지난 10월 중순 고려영을 방문하여 현지인들에게 지역 명칭의 유래를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짜증을 내는 사람도 있었다. 고려영을 의문부호로 남긴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청 황제 의도 꿰뚫은 연암



열하의 피서산장은 조선 사신들이 청나라 황제를 만나기 위해 가야 했던 곳이다. 연암을 포함한 사신 일행은 건륭제의 생일잔치를 승덕에서 연다는 이유로 밤낮을 달려 승덕으로 향하였다. 이곳은 열하라고 불리며, 승덕은 행정상의 지명이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실제로는 여기가 지형적으로 험하고 중요한 곳을 차지하여 몽골의 숨통을 죌 수 있는 변방 북쪽의 깊숙한 곳이므로 이름은 비록 피서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천자 자신이 나서서 오랑캐를 막으려는 속셈이다"라고 하여, 청나라 황제들의 열하 행차가 몽골 지배와 관련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는 현재 청대사 연구자들의 견해와 일치하며, 심지어 우리나라에 번역된 '대청제국 1616~1799: 100만의 만주족은 어떻게 1억의 한족을 지배하였을까?'(이시바시 다카오)란 책에도 인용이 될 정도였다. 연암의 탁월한 정치외교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승덕의 볼거리는 피서산장과 외팔묘(外八廟)이다. 피서산장의 건물들은 북경의 자금성과 비교하면 수수하고 소박하여 황제가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이 가운데 사지서옥(四知書屋)은 건륭제 이후 청나라 황제들이 외국의 사신이나 친분 있는 신하들과 만나던 장소였다. 조선 사신들도 이곳에서 청나라 황제들을 만났다고 한다. 외팔묘는 티베트의 수도였던 라싸에 있는 포탈라궁을 모방해 만든 보타종승지묘(普陀宗承之廟), 판첸라마를 위해 지은 수미복수지묘(須彌福壽之廟), 세계 최대의 목조관음상으로 유명한 보령사(普寧寺), 몽고 사신들을 접견하기 위한 보락사(普樂寺) 등 티베트불교의 영향을 받은 8개 불교사원을 지칭한다. 연암과 사신 일행은 건륭제의 명령으로 이 외팔묘 가운데 찰십륜포(札什倫布), 즉 현재의 수미복수지묘에 있던 판첸 라마를 방문하였다.



피서산장의 입구인 여정문(麗正門)의 현판은 한자·만주문자·몽고문자·티베트문자·위구르문자 등 5개 언어로 기록되었다. 이는 청나라가 5개의 주요 민족들을 통치했던 다민족 국가였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청나라가 만주인들이 세운 '오랑캐 왕조'라는 생각이 강했던 고루한 조선 사신들은 다문화와 다민족으로 구성된 청나라를 이해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건륭제는 조선의 사신들에게 활불(活佛), 즉 환생한 부처라는 판첸 라마를 만나라고 권하였지만, 낡은 사상에 사로잡힌 조선 사신들은 판첸 라마가 중국인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그 결과는 냉대로 돌아왔다. 연암은 "지금 북경으로 돌아가는 마당에는 측근의 신하가 나와서 전송하지도 않고, 황제 역시 한마디 위로의 말조차 없다. 아마도 우리 사신이 활불을 기꺼이 보려고 하지 않은 탓에, 처음에 받았던 대우와는 다르다는 탄식이 있게 된 것이다"라고 적었다. 여기서 '사신'은 연암의 종형인 박명원을 지칭한다. 반면 연암은 열하일기에 판첸 라마와 티베트불교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여 지적인 호기심과 기록정신을 보여주었다.



◆고려보 사람들과 조선 사신단의 반목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고려보 사람들과 조선 사신 일행의 반목에 대해 기록했다. "같은 나라의 옛 정리를 생각해서 주인이 지키는 것을 그다지 심하게 하지 않으면, 그 틈을 노려 물건을 훔치기까지 하였으니, 이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점점 싫어하게 되었다. 매번 사행이 도착하면 술과 음식을 감추고 팔지 않으려 하고, 간절하게 요구해야 마지못해 팔긴 하지만 바가지를 씌우고 혹 값을 먼저 치르라고 한다. 이렇게 되자 말몰이꾼들도 반드시 온갖 꾀를 동원하여 사기를 쳐서 분풀이를 하니, 서로간에 상극이 되어 원한이 깊은 원수를 보듯 한다."



지금 중국 내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에 200여년 전 연암이 걱정했던 그 반목과 질시가 잔존한다는 점에서 자괴감이 든다. 우리 민족은 언제쯤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서로 다투지 않고 화합하고 단결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중국이라는 큰 무대에서 조연이 아니라 주연으로 활약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꼭 오기를 기대한다. [기사제공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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