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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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목단강지역 독립운동유지 보존회 | 노경래 회장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행복은 100여 년전 일제하에서 희생되신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노고와 헌신 덕분이다. 그분들의 목숨을 내건 항일투쟁이야 말로 민족의 생존은 물론 유지 보존의 절대적 공헌이었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렇기에 그들의 후손이고자 하는 우리는 그분의 높고 고귀한 희생(犧牲)을 단 한시라도 잊을 수 없으며 힘닿는 데까지 그들의 업적을 선양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는데 게으름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아직 우리는 너무나 많은 선열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찾아내지 못했고 있다.
그중에서도 백포 서일 총재에 대한 기억이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한다.

그는 나라 잃은 암울(暗鬱)한 조국을 구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주장하고 또 가장 앞장서서 실천했던 인물이었다. 대종교의 민족정신을 통한 국민들의 자각과 민족 정체성 회복운동을 행한 이유는 그것이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전제였기 때문이다. 깨어 있고 자각한 민족만이 국난을 극복하고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늘 국민계몽을 위한 민족주의 교육을 중요시 여겼다. 민족교육을 통해 각성된 제자들을 중심으로 그는 조직을 만들었고 그 조직이 항일무장투쟁의 선봉대들이었으며, 그들이 청산리 항일대첩의 주역들이었다.

백포 서일은 일제 하 41년이라는 짧은 생애동안 종교활동과 민족교육 사업 그리고 항일무장투쟁 단체의 조직과 무력항쟁의 진행 등 실로 엄청난 업적을 쌓은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는 여느 독립운동 지도자에 비하면 의외일 정도로 일천하고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의 성품 자체가 항일운동이라는 본연의 일 자체보다 이름을 우선 거들먹거리며 앞장서는 세속적 인물들과는 워낙 다르기 때문에 두드러지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약화된 대종교의 교세를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서일에 대한 연구는 항일무장투쟁분야에서 칭송되는 북로군정서의 청산리 대첩에서 조금 언급되는 정도이지만 이도 김좌진 장군이나 이범석 장군 등에 가려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하물며 대중적 차원의 인지도(認知度) 역시 낮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술한 청산리 대첩은 물론 1910년대와 20년대 초반 빛나는 항일투쟁의 성과에는 반드시 백포 서일의 존재가 드러난다. 그는 결코 매명에 힘쓰는 사람이 아니었고 스스로 무슨 무슨 단체의 장이 되기를 원했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추대에 의해 늘 최고 지도자로 전면에 등장한다. 봉오동, 청산리의 승리를 앉고 집결한 독립군 부대가 일사불란(一絲不亂)한 조직체계를 완성하기 하기 위해 만든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도 서일이었다. 그의 나이 불과 40살 이었음에도 그는 홍범도, 김좌진, 최진동 같은 쟁쟁한 지도자들에 의해 영수로 추대될 정도의 인물인 것이다.

백포 서일은 모든 명예나 권한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 타인의 공으로 돌렸다. 바로 이러한 인품이 오늘 서일을 낯선 인물로 만들었다면 이는 후손들의 절대적인 잘못이다. 아무리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서운해 하지 말라고 했지만 후배들은 그런 선배를 더욱 높이고 경모(敬慕)해야 한다.

오늘 이 기회가 그런 우리들의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더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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