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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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吉林省)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연길기차역을 중심으로 반경 100킬로미터 이내에 윤동주 생가, 옛 대성중학, 일송정, 간민회 본부, 봉오동 승첩지 등 30여개의 주요 독립운동 유적지가 있다.

연변지역은 조선시대 말 조선인들이 이주 및 정착하며서 당시 조선인 촌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자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의 기지 역할을 하게 됐다.

(본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됨)
명동교회 명동역사전람관 , 윤동주 생가
명동교회와 윤동주 생각의 현 주소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이다. 연길역에서 직선거리로 약 24Km 거리에 위치한다.

◆ 명동교회
명동교회는 규암 김약연이 1909년 설립한 이후 이주한인에게 민족공동체의 구심점으로서 종교적 기능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책원지 기능을 담당하였다. 민족의 얼이 서려 있던 명동교회는 해방이후 잊혀진 존재였다가 1990년 한중 수교 이후 국내의 뜻있는 인사들의 관심으로 보수•관리되고 있다. 특히 저항시인 윤동주의 생가가 인접해 있어 중요한 사적지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명동교회를 수리하여 만든 명동역사전람관이 있으며 이 전시관에는 이주한인사회의 모습과 독립운동의 중요 인물을 중심으로 한 전시물들이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 윤동주 생가
윤동주의 생가는 윤동주가 태어나 15세까지 살았던 곳으로 「별헤는 밤」 등의 시를 통해 그리워 한 북간도의 집이다. 대지 300여 평에 외양간 등이 실내에 있는 함경도 전통가옥의 본채와 별채가 그대로 복원되었다. 사각모양의 나무로 된 우물도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대표적인 민족시인인 윤동주 생가의 방문을 통해 그의 사상과 저항시인으로서 자신의 시세계를 형성했던 배경 등을 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유적지는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주선으로 복원되었다.
간민회 본부 유적지
현 주소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서광골목(曙光胡同)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길역에서 직선거리 약 1km로 연길시 중심에 있다.

간민회는 1913년 4월 북간도 지역의 민족 지도자들이 한인 사회의 실업과 교육·재산의 보호 및 복리 증진 등을 목적으로 설립한 합법적 자치 기관이다.

독립운동 진영의 언론에서는 간민회에 대해 일반 재류 동포가 성심 찬송하며, ‘장차 자치 생활을 할 만하게 되었다’고 하거나 ‘이주 한인 전체의 오직 하나요, 우리 민족에게 큰 신임과 애정을 받는 기관’이라고 보도하고 있었다. 또한 간민회가 조직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 정부가 연성 자치(聯省自治)를 인정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 지도자들의 활동이 보다 용이한 측면도 있었다.
윤동주 기념관 옛 대성중학, 현 용정중학 역사전람관
현 주소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룡정시 민성가(民声街) 789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길역에서 직선거리 약 14km 거리에 있다.

1921년 강훈이 설립한 대성중학교는 창립 초기 7명의 교사와 160명의 학생이 있었다. 1939년 만주국에 의해서 동흥중학교에 합병될 때까지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대성학교는 현재 용정중학 내 옛 교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교정에는 윤동주 시비와 은진, 영신 동흥, 대성, 광명여자중학, 명신여자중학 등 용정 내 6개 중학의 역사와 윤동주의 생애와 그 주변인물 등 역사적 사건 및 인물 중심으로 전시한 기념관과 ‘별’잡지사가 있어 국내외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한편, 현재 용정중학교 역사전람관에 있는 윤동주기념관은 독립기념관과 연변대학 민족연구원 민족역사연구소가 공동으로 내부 전시 자료를 교체•보완하여 2005년 12월 16일 재개관됐다.
용정 일송정
현주소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룡정시 비암산(琵岩山)이며 연길역에서 직선거리 13.5km이고 옛 대성중학교와 가깝다.

연길에서 용정으로 차를 타고 가다보면 용정에 들어서는 길목 우측에 비암산이 있다. 비암산 정상 소나무 옆에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일송정 푸른 솔이 늙어 늙어 갔어도"로 시작하는 노래 선구자의 '일송정'이다.

60여년전 항일혁명근거지의 비밀 회의 장소로 활용하는 등 많은 애국인사들과 애국청년들이 모여 활동한 곳이다. 일송정은 당시 일제가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말려 죽이고 정사를 파괴했는데, 1990년에 복구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봉오동 승첩지
현주소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봉오저수지(凤梧水库)이며 연길역에서 직선거리 약 32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봉오동 전투가 전개되었던 봉오동 하촌·중촌·상촌은 도문시의 수원지(水源池) 건설로 수몰된 상황이다.

봉오동 승첩지는 1920년 6월 6·7일 홍범도·최진동의 독립군이 일본군과 전투하여 승전을 거둔 곳이다.

1920년 6월 4일 대한 신민단의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으로 진입해 들어가 일본군 순찰 소대를 습격해 타격을 입혔다. 다음날 일본군 1개 소대 병력이 두만강을 건너 추격해오자, 대한 북로 독군부의 독립군은 삼둔자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함경남도 나남에 본부를 두고 있던 일본군 19사단은 삼둔자 전투에서의 패배에 분개하여 월강 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하여 독립군을 섬멸하고자 했다.

홍범도가 이끈 독립군 연합 부대는 봉오동의 산지에 매복하였다가 안천(安川) 소좌가 이끈 일본군 추격대대를 삼면에서 포위하여 궤멸시켰다. 일본군은 수많은 병력이 사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한편, 봉오동 승첩 기념비는 원래 승첩 장소가 아닌 봉오동 저수지 남쪽 200여m에 위치한 곳에 건립하였으며, 2010년 주변이 심하게 훼손되어 일부 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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