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9
  • 언어선택
상하이에는 상하이임시정부를 비롯하여 윤봉길 의사의 거사 현장, 황포탄 의거지, 만국공묘 독립운동가 묘소 등 10여개의 독립운동 유적지가 있다.

상하이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발한 독립운동이 펼쳐졌던 곳이며 상하이임시정부는 우리나라 대통령을 비롯해서 상하이를 찾는 많은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여행지이기도 하다.

(본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됨)
상하이대한민국임시정부유적
상하이대한민국임시정부유적의 현주소는 상하이 루완구 마당로 304번지이며 상하이역에서 직선거리 3.9km에 위치하고 있다.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하이의 프랑스조계에서 수립되었다. 이후 1932년 4월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를 계기로 상하이를 떠나 항주로 이전할 때까지 임시정부는 만 13년 동안 상해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장소나 청사의 위치는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김신부로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지만, 그 번지수를 알지 못한다. 임시정부의 청사도 한 두 곳이 아니었다. 여러 곳으로 옮겼고, 현재 확인된 것만도 12차례 이상된다. 수립 직후 임시정부 청사는 태극기를 게양할 정도로 공개적이었지만, 1919년 10월 프랑스 조계당국으로부터 폐쇄조치를 당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청사는 개인의 집이나 기관에 사무소를 두었다.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다가 안정적인 청사를 마련한 것은 1926년 3월이었다. 백래니몽 마랑로 보경리 4호에 청사를 마련한 것이다. 이후 임시정부경제후원회가 조직되어 이를 유지하였고, 1932년 5월 항주로 이전할 때까지 6년 동안 이곳에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가 청사로 사용한 보경리 4호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990년 상하이시 루완구에서 문물보호단위 제174호로 지정하였고, 1993년 4월 현지에 원형대로 복원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전람관’으로 꾸며 놓았다. 이후 2001년 주변을 매입하여 전시관을 확장, 재개관하였다.
윤봉길의사 거사현장 | 루쉰공원
윤봉길의사 거사현장인 현재의 루쉰공원(홍구공원)은 상하이 쓰촨북로(四川北路)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하이역에서 직선거리 3.6km에 있다.

윤봉길의사는 이곳에서 1932년 4월 29일 일본의 상하이사변전승축하식 및 천장절 기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백천의칙(白川義則) 육군대장을 비롯한 일본의 수뇌부를 처단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사의 일황저격의거가 결행된 후 중일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1월 28일 일본군이 상하이를 무력으로 침공한 상하이사변이 발발한 것이다. 중국은 19로군을 비롯한 30만 병력을 동원하여 일본군과 싸웠지만, 막아내지 못하였다.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은 홍구공원에서 전승축하식과 함께 일본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하고자 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김구와 윤봉길은 홍구공원 기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김구는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김홍일에게 고성능 폭탄을 제조해 달라고 부탁하였고, 김홍일은 행사장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도록 도시락과 수통형 모양의 폭탄을 만들었다.

1932년 4월 29일 예정대로 홍구공원에서 상하이점령 전승축하식과 천장절 기념식이 개최되었다. 윤봉길은 일본국가가 합창될 때 기념식장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은 굉음을 내며 폭발하였고, 기념식 단상에 있던 일본 요인들이 나뒹굴었다. 상하이거류민단장 하단정차(河端貞次)와 상하이파견군 총사령관인 육군대장 백천의칙(白川義則)은 사망하였고, 이외에 해군제3함대사령관 야촌길삼랑(野村吉三郞), 주중국공사 중광규(重光葵), 해군 중장 식전겸길(植田謙吉), 상하이총영사 촌정(村井), 거류민단 서기장 우야(友野) 등이 중상을 입었다.

홍구공원은 1989년 그 이름이 루쉰공원(魯迅公園)으로 바뀌었다. 윤봉길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곳은 현재 루쉰의 동상이 세워진 앞 광장으로 짐작된다. 공원 안에는 1994년 윤봉길의거를 기념하여 매정(梅亭)이란 이름의 2층 건물을 지었고, 1998년에는 매정 입구에 ‘윤봉길의사의거기념비’를 세웠다. 매정에는 2003년 독립기념관의 지원으로 윤봉길의사의 생애와 활동에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황포탄 의거지
당시 상하이 황포탄(黃浦灘) 세관부두였던 현재 와이탄공원(外灘公園)에서 1922년 3월 28일 의열단원 오성륜과 김익상이 일본육군대장 전중의일(田中義一)을 저격했다.

일본육군대장 전중의일이 필리핀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는 도중 상하이에 들렸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의열단원 오성륜과 김익상은 1922년 3월 28일 배에서 내리는 전중의일을 권총으로 저격하였다. 오성륜이 권총을 발사한 순간 전중의일 앞으로 영국 부인이 나타나 총을 맞았고, 그 여인은 불행히도 숨졌다. 뒤이어 김익상이 다시 폭탄을 던졌지만, 불발이 되고 말았다.

오성륜과 김익상은 현장에서 피체되었고,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서로 인도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일본으로 이송도중 오성륜은 배에서 뛰어내려 탈출하였다. 김익상은 일본 장기(長崎) 재판소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몇 차례의 감형으로 20년을 복역하였다.

상하이시가 와이탄부두를 정비하여 공원을 만들면서, 의거 장소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와이탄공원의 북쪽 끝으로 추정된다.
만국공묘 독립운동가 매장됐던 곳
만국공묘에는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 등의 유해가 묻혀있었다. 현재는 쑹칭링릉원(宋慶齡陵園)이 있으며 상하이역에서 7.6km 거리에 있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타계한 인사들은 대부분 정안사로(靜安寺路)에 있는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 이 묘지는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상하이시의 도시재개발사업 등으로 인해 철거됐고, 그곳에 있는 한국인과 외국인의 묘는 만국공묘(萬國公墓)로 이장하였다. 이후 만국공묘는 송경령(宋慶齡)이 묻히면서 송경령능원(宋慶齡陵園)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만국공묘에는 한국인의 묘로 확인되고 추정되는 14기의 묘가 있다. 이 가운데 박은식·신규식·노백린·김인전·안태국의 유해는 1993년 8월 5일 국내로 봉환되었고, 윤현진·오영선의 유해는 1995년 6월 21일 봉환되었다. 이외에 아직 조상섭·임계호 등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표석이 남아 있다.
관련뉴스/포토 (12)
#태그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