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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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도 베이징에는 수만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지만 일제하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기억하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베이징에는 이육사 시인이 순국한 일본총영사관 감옥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지사 이회영, 신채호 등이 거주한 유적이 있다. 현재는 당시의 건물이 허물어져 사라졌지만 베이징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서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본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됨)
이육사 순국지 | 일본총영사관 감옥 구지
이육사 시인이 순국한 일제시대 베이징의 일본총영사관 감옥이 있던 자리는 베이징역에서 2.6km 거리에 있다. 현 주소는 베이징 둥청구 둥창골목(东厂胡同) 28번지이다.

이육사는 1943년 당시 베이징에서 신문보급소를 경영하던 이상호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해 말 국내로 잠시 들어왔다가 체포됐다. 국내에서 체포된 이육사는 다시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베이징에 있던 일본총영사관 감옥에 투옥됐다. 그는 폐병으로 원래부터 몸이 약했는데, 투옥되면서 잘 먹지도 못하고 추운 감방에서 고생하여 병이 심해져 결국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가 사망한 장소는 기록에 의하면 ‘북경시 내일구 동창호동 1호(北京市 內一區 東昌胡同 1号)’로 되어 있다. 이곳은 조선의용대원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영천 출신 이원대가 1943년 6월 사망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원대는 이육사보다 7개월 앞서 순국했다.

왕푸징(王府井)에 위치한 이곳은 구 일본 헌병대 베이징본부 부속 형무소였으며, 현재 부근에는 중국사회과학원 근현대사연구소가 위치하고 있다. 당시의 동창호동 1호는 현재의 둥창골목 28번지이며 건물 내에는 몇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신채호 거주지 보타암
신채호가 거주했던 보타암은 베이징시 시청구 둥볜먼차오(东便门桥, 사진)의 근처이며 현재는 보타암은 사라지고 호국태평궁비(护国太平宫碑)만 세워져 있다.

신채호는 1918년경 이곳 보타암에 거주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한국사 연구와 집필에 전념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경에서 발행되던 중화보(中華報),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논설을 발표하면서 명성을 드날렸다. 이러한 논설을 통해 신채호는 ‘한중항일공동전선’을 결성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창하기도 하였다.

당시 보타암은 도교사원인 태평궁太平宮에서 운하를 사이에 두고 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도시개발로 운하가 고가도로로 변하였고, 길건너 북쪽에는 고층건물이 들어서 있어 당시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이회영 거주지
이회영은 1920년경 베이징 둥청구 후고루원 골목(后鼓楼苑胡同, 사진)에서 거주했다. 이곳은 베이징역에서 4.8km 거리에 있으며 당시 이회영이 살았던 집은 찾을 수 없고 골목만 확인된다. 골목에는 당시의 건물로 보이는 가옥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후고루원 골목은 1919년 3월 베이징에 돌아온 이회영이 국내에서 건너온 식구들과 함께 보금자리를 꾸민 곳이다. 당시 상하이에서 이회영과 같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관여했던 이동녕, 조완구, 이광, 조성환, 박용만, 김규식, 김순칠 등도 베이징으로 모여들었다. 이때 이회영의 집에는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심훈 등이 기숙하기도 했다.

당시 국내의 독립운동 인사들이 베이징에 오면 반드시 이회영을 찾아왔을 뿐 아니라 기거하는 경우도 많았다. 베이징의 인사들 뿐 아니라 베이징을 찾는 독립운동지사들로 언제나 붐비던 이회영의 집은 당시 베이징지역 독립운동계의 지도부나 다름없었다. 이회영 집에는 매일같이 적게는 10명, 많을 때는 3~40명씩 찾아왔다고 한다. 이회영은 그들에게 점심과 저녁을 대접하곤 하였다.

그러나 밀려오는 독립운동지사들을 접대하기에 집이 너무 협소하여 보다 넓은 이안정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후고루원호동 골목에는 김달하가 살았고, 길 건너 500m 거리에 신채호가 머물렀던 관음사가 위치하고 있다.
대한독립청년단 본부 구지
1919년 신채호 등 북경에 거주하는 한인학생들이 조직했던 대한독립청년단의 본부 터가 베이징 시청구 샤오스차오골목(小石桥胡同) 7번지에 있었다. 그러나 대한독립청년단 본부 건물이 허물어져 현재는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1919년 9월 베이징, 톈진 부근의 대학생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략을 반대하며 무장 군사활동을 위해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였다. 이때 학생들은 신채호를 단장으로 추대하였다. 이 단체는 달리 '북경학생단' 또는 '대동청년당'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당시 신채호는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하였으나, 위임통치를 주장한 이승만이 국무총리, 대통령으로 결정되자 임시정부와 결별을 선언하고 반임시정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4월 신채호는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건너와 대한독립청년단을 지도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독립청년단은 중국 전 지역에 조직망을 펼쳐 베이징에 본부를 두고 각 지방에 지부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직은 단장 신채호, 부단장 한진산, 총무ㆍ통신 한진산 겸무, 내무부장 겸 재무부장 조동진, 외무부장 문철, 군무부장 서왈보, 서기 방석범 등 7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중화성경회 구지
베이징 고려기독교청년회 사무실이 있던 곳의 현주소는 베이징 둥청구 둥단북대가(东单北大街) 21번지이다. 베이징역에서 직선거리 1.5km 거리에 있으며 당시 건물이 현재도 남아있다.

베이징고려기독교청년회는 1920년 겨울 이용설, 이대위, 문승찬 등이 한국기독청년과 학생들을 규합하여 조직한 단체이다. 이 단체는 표면으로는 기독교청년 학생조직을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한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크게 힘을 쏟았다.

이 단체의 조직이 점차 확대되면서 교민회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 한인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신채호, 한진산, 서왈보 등 독립운동가와 연결되어 화북일대 한인들의 결집에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의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현재는 베이징시 기독교무위원회와 베이징시 기독교 삼자애국운동위원회가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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