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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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대혁명 시절, 홍위병으로 있었던 변호사 장훙빙 씨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절 홍위병 출신의 변호사가 자신의 고발로 어머니가 총살당한 사실을 뒤늦게 고백해 화제가 되고 있다.



베이징 보성(博圣)변호사사무소의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장훙빙(张红兵, 59) 씨는 베이징 지역신문 신징바오(新京报)와의 인터뷰에서 문화대혁명 시절 홍위병이었던 자신이 모친 팡충머우(方忠谋·당시 44세) 씨를 '반혁명분자'로 군에 고발해 총살당하게 한 일화를 고백하고 당시의 일을 참회했다.



보도에 따르면 문화대혁명이 한창이었던 1970년, 당시 16세였던 장 씨는 홍위병이었다. 그는 원래 이름인 톄푸(铁夫)를 '붉은 병사'라는 뜻의 '훙빙(红兵)'으로 바꿀 정도로 그는 마오쩌둥(毛泽东)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비극은 1970년 2월 13일에 일어났다. 그 날, 안후이성(安徽省) 벙부시(蚌埠市) 우허현(五河县)의 집에서는 문화대혁명과 관련해 장 씨의 모친 팡 씨, 외삼촌, 동생 등 가족간의 논쟁이 벌어졌다. 팡 씨는 그 자리에서 마오쩌둥을 비판하고 류샤오치(刘少奇)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당시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은 신성모독이나 마찬가지였다.



장 씨는 팡 씨의 발언에 격분해 "당신은 이제 어머니가 아니라 인민의 적"이라고 했으며 장 씨의 아버지도 "당신이 방금 말한 독설을 모두 글로 쓰라"고 요구했다. 팡 씨가 자신의 말을 글로 다 쓰자, 장 씨와 아버지는 곧바로 군 부문에 가서 어머니를 고발했다. 장 씨는 여기에 "반혁명 현행범 팡중머우를 타도하자. 총살하자"라고 쓴 별도의 글도 제출했다.



이후 군은 장 씨의 집으로 들이닥쳐 팡 씨를 폭행한 후, 압송했으며 두달 뒤 총살했다. 장 씨는 "나도 당시에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고 현재의 시각으로도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랬다"고 말했다.















▲ 장훙빙 변호사의 어렸을 당시 가족사진



모친이 총살당한 후, 시간이 흘러 1976년 10월 '4인방(마오쩌둥의 부인 장칭과 마오쩌둥의 동료였던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이 체포된 후에야 장 씨는 비로소 극도의 공포감이 몰려왔다. 그는 극도의 우울증을 앓았으며 타인과도 접촉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부자는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장 씨는 인터뷰에서 "수십 년간 마음 속으로 스스로를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되뇌었다", "흐느껴 울기도 하고 미친듯이 소리치기도 하고 대성통곡하기도 했다" 등 수십 년간 자신을 얽맨 고통을 털어놨다.



또한 "꿈 속에서 '어머니, 불효자가 무릎 꿇고 사죄드립니다'라고 애원했지만 어머지는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며 "이는 어머니가 내게 벌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 씨는 나름대로 어머니께 속죄하고자, 갖은 노력을 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쑤현(宿县) 법원에 어머니의 누명을 벗겨달라는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1980년 7월 23일 "팡 씨가 억울하게 처형됐다"고 판결했다.



법원 판결 후, 장 씨는 그 날의 비극을 가슴 속에 묻어두고 살아왔지만 2009년 인터넷에서 '문화대혁명'을 찬양하는 글을 본 후, 생각이 바뀌었다.



장 씨는 "유명 문학가인 바진(巴金·1904∼2005)은 지난 80년대 초 '문화대혁명 박물관'을 세워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당시의 충격적인 진실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며 "인터넷 글을 본 후에 당시의 진실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게 됐다"고 말했다.



장 씨가 2011년 9월부터 어머니의 묘를 문화재로 지정받으려는 활동을 펼쳐 온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는 구진현(固镇县) 관련 부문에 관련 서류를 제출했지만 비준받지 못했으며 이와 관련해 법정 소송도 벌였지만 패소했다.



장 씨는 마지막으로 "나 자신이 바진이 말한 박물관의 '구체적인 자료'의 조건에 부합한다"며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온바오 박장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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