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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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영웅 이홍광 장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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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抗日英雄李红光将军之墓
  • kàng rì yīng xióng lǐ hóng guāng jiāng jūn zhī m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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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오락 > 역사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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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랴오닝 푸순 신빈 만족자치현 红庙子乡查家村黑瞎子望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471.1km
◆ 중국 랴오닝성 신빈(新賓)현 청 소재지에서 50㎞ 가량 떨어진 훙먀오쯔(紅廟子)향의 헤이샤쯔왕 마을. 지난달 26일 길에서 만난 마을 사람들은 “성이 이씨인 조선족 사령관이 여기에 매장됐다는 얘기를 어릴 때부터 들어 왔다”며 “그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른들은 모두 ‘이 사령’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 산을 오른 지 한시간여 만에 주민 치훙옌(55)의 도움을 받아 한 돌무덤을 찾아냈다. 햇볕 한 조각 들지않는 돌들에는 푸르스름한 이끼들이 잔뜩 끼어 있었다. “이곳이 20년 전 신빈·번시(本溪)·환런(桓仁)현 당사((黨史)연구실이 합동 답사해 이홍광(1910~1935)의 무덤으로 확인한 곳이다.

◆ 주민 증언과 (길쭉한) 중국식이 아닌 (동그란) 조선식 무덤 형태 등을 볼 때, 부하 한진이 그의 주검을 수습해 매장한 곳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홍광 전문가’인 차오원치(曹文奇)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부이사장은 “당시 일본군이 주검을 훼손할까봐 이렇게 산속 깊은 음지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며 “조선인이 이홍광의 묘지를 찾아온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 현지 주민에게 ‘조선족 이 사령’으로 기억되지만, 남한에서는 철저히 잊혀진 이홍광. 죽어서는 숲 속 음지에 묻혔지만, 생전에 그의 항일투쟁은 눈이 부셨다. 1930년대 남만주 최초로 유격대를 창설해 수년간 일본군과 그 괴뢰인 만주국군에 맞섰고, 압록강을 건너 국내 진공작전도 전개한 그는 남만주 항일운동의 전설로 남았다.

◆ 이홍광은 망국의 해인 1910년 경기도 용인에서 가난한 농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가난과 핍박에서 벗어나려고 1926년 지린성 이퉁현으로 이주했다. 1930년 중국공산당에 들어간 그는 1931년 7월 대원 7명으로 구성된 적위대를 꾸려 대장이 되고 농민운동과 항일투쟁을 이끌게 된다. 적위대의 별칭은 ‘친일파(개)를 때려잡는다’는 뜻의 ‘개잡이대’(타구대)다. ‘개잡이대’는 남만주 최초의 항일유격대인 반석유격대로 발전한다.

◆ 1933년 9월에는 중국인 양징위(楊靖宇)와 함께 300여명 규모의 동북인민혁명군 1군을 만들어 찐장이 됐고, 이듬해 11월 동북인민혁명군 1군이 2개 사로 재편될 때 1사 사장에 올랐다.

◆ 그의 신출귀몰하고 배포 큰 ‘기만전술’은 만주 항일투쟁사의 장쾌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1934년 봄 이홍광은 양징위와 함께 200여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류허(柳河)현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 1만2천여명의 포위공격을 받게 된다. 이홍광은 예전에 탈취한 일본군복을 부하들에게 입혀, 새롭게 보충된 일본군 부대로 속여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일본군 부대와 교차하는 순간에는 기습공격을 감행해 2개 소대를 섬멸했다. 이어 식품과 탄약을 싣고 가던 일본군 차량을 세운 뒤 “왜 이리 보급이 늦냐”고 호통을 친 뒤 군수품을 가로채기도 했다.

◆ 이홍광의 두드러진 활약 중 하나는 평안북도 후창군 진공작전이다. 1934년 12월과 1935년 1월 이홍광은 200여명의 기마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북 후창군(현 김형직군) 하성읍과 동흥성을 습격한다. 작전이 얼마나 신출귀몰했던지, <동아일보> 등은 “이홍광은 약관의 여비적(여자 도적)”이라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차오원치 부이사장은 “교전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일본 불패 신화’에 타격을 줬다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 이홍광은 1935년 5월 환런현과 신빈현 경계인 라오링(老嶺) 부근에서 200여명의 부하들과 행군하던 중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만나 교전을 벌이다 가슴에 총탄을 맞았다. 부하들은 끝내 적을 물리치고 그를 후방으로 후송했지만, 이내 숨이 멎었다. 그의 나이 25살 때였다.

◆ 현재 남만주 일대에는 그의 짧지만 의미있는 생애를 기리는 기념물들이 즐비하다. 지린성 판스시 조선족중학교의 이름이 홍광중학교이고, 학교 정면에는 ‘항일 민족영웅 이홍광 장군’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차오원치 부이사장은 “중국에서 그를 소개한 잡지나 논문, 전기가 1천여편에 이른다”고 말했다. 이퉁현과 신빈현에도 이홍광의 기념비와 흉상이 있고, 광복 뒤 조선의용군 1지대는 ‘이홍광지대’로 이름을 바꿨다. 장세윤 고구려재단 연구위원은 “이홍광의 후창군 습격은 김일성의 보천보전투보다도 앞서 이뤄진 국내 진공작전이지만,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자료 출처 : 한겨레]

◆ 사진설명 : 랴오닝성 공산당학회 부시장 장다캉(张大庸, 左三), 푸순시사회과학원 원장 보포(傅波, 左四, 푸순시 사회과학원 부원장 왕바오라이(王宝铼, 右一), 푸순시 사회과학원 당사연구실 주임 류창(刘畅, 左二) 등 조사원이 이홍광 장군의 묘 앞에서 확인조사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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