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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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천길
+
1234
    주소
  • 서울 종로구 신영동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5.2km
** 길이름 유래 : 조선시대에 이 하천 연안에 중국의 사신이나 관리가 묵어가던 홍제원이 있었던 까닭으로 홍제원천이라고도 한다. 길 이름은 홍제천변에 있다고 해서 홍제천길이나, 길에 관한 이야기는 길이 굽이돌며 끼고 있는 홍제천에 있다.

** 스토리 : 화냥년. 그게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이름이다. 나는 청나라에서 고향 조선으로 돌아온 환향녀(還鄕女)였다. 그 이후로 환향녀라는 이름은 화냥년으로 변모하며 낙인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1639년 1월, 남한산성에서 우리의 왕은 조선 땅을 침입한 청 태종에게 항복을 했다. 폐허가 된 도성의 백성들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 갔던 조정의 자세한 속사정을 나는 잘 모르지만 사람들 이야기에 따르면 그곳에서 백성을 걱정하는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고 한다. 그곳에 있었던 것은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이기적인 신하들과 무능한 왕뿐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 나라의 국왕이며 학식이 높은 조정의 대신들인데 그런 이들이 도성을 버릴 때는 오죽했겠나 싶었다. 다만 버림을 받은 억울한 백성들이 만들어낸 과장된 이야기일 거라고 믿고 싶었다.

전쟁 전, 나는 혼인을 앞두고 있는 18살의 처녀였다. 우리 집은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진사라도 지낸 양반집이었기 때문에 꽤 괜찮은 집안이 나의 혼처로 정해져 있었다. 남자의 집에서 사주단자를 보내왔던 병자년 겨울 즈음에 오랑캐가 도성까지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결혼은 그 와중에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다른 집들처럼 우리 집도 피난 길에 올랐다. 청나라의 병사들이 도성의 보이는 집들마다 들이닥쳐서 약탈을 하고 불을 질렀기 때문에 도성 가득한 연기 속에 피난민들은 우왕좌왕했다. 나도 그 와중에 그만 부모님과 헤어졌다. 전쟁 중에 여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값나가는 물건들처럼 약탈대상에 불과했다. 몸이 남자처럼 날렵하지 못하여 미처 도성을 빠져나가지 못한 여자들은 그대로 청나라 병사들의 전리품으로 전락했다. 전쟁의 광기에 휩싸인 병사들은 아녀자와 처녀를 가리지 않고 빼앗고 겁탈했다. 많은 여자들이 능욕을 피해 자결을 선택했다. 목을 매거나 소도(小刀)로 스스로를 찌르고, 강물에 몸을 던졌다.

‘저들에게 여자들은 약탈할 물건에 지나지 않으니 가치 없는 물건이 되면 되겠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얼굴과 몸에 오물을 묻혔다. 덕분에 나는 겁탈은 면했지만 청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전쟁 내내 마소처럼 청군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갖은 고생을 겪었다. 발이 얼어 더는 걸을 수도 없던 이듬해 정축년 정월, 나는 평양에서 왕의 항복소식을 전해 들었다. 솔직히 나는 전쟁에 진 치욕보다는 이제 전쟁이 끝났구나 하는 안도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청 태종은 소현세자를 비롯하여 전쟁 중에 잡힌 포로 60여만 명을 인질로 요구했다. 우리들 모두를 청나라 심양까지 끌고 가겠다는 것이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았지만 그때도 난 왕과 조정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들이나 나나 똑같은 피해자라는 생각만 들었다. 며칠이 지나자 오히려 마음이 담담해졌다.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심정이랄까. 심양까지 가는 길은 멀고 힘들었지만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니 못 견딜 일도 없었다.

심양에서도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나는 한 청나라 장수의 첩이 되었다. 말이 첩이지 생활은 종살이보다도 못했다. 그나마도 나는 나은 편이었다. 남편이 첩을 데려온 것을 질투했던 청나라 본처 중에는 조선 여자에게 끓는 물을 퍼부은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에 머무는 매 순간마다 자결을 생각해보지 않은 순간은 없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의 마음을 붙잡아 준 것은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희망이었다. 원치 않는 잠자리를 가지고, 질투하는 본처의 매질을 당하면서도 오직 기다렸던 것은 오직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다시 만나는 날이었다.

2년 후 조선 조정은 청나라와의 인질 석방 합의에 성공했다. 꿈에도 그리던 그 날이 마침내 온 것이다. 나는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회임한 것을 알았다. 꽤 배가 불렀었는데도 귀향 소식에 들떠서 전혀 몰랐던 것이다. 나는 도성에 도착하기 직전 아이를 낳았다. 예쁜 딸이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3월경으로 갓 태어난 우리 아이처럼 아름다운 새싹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부모님들이 아직 옛날 집에 살고 계실까.’

막상 집 앞에 도착해서 아버지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확인하고 나니 심경이 복잡했다. 사무치게 보고 싶었던 그리움, 재회를 앞둔 설레는 마음, 아이까지 안고 돌아온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하는 불안함 등 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한꺼번에 머리를 스쳤다. 정말로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우려와는 달리, 부모님은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버선발로 달려 나오셨다. 대략 짐작을 하셨던지 내 품에 안긴 아이도 선뜻 받아 안으셨다. 나는 부모님을 뵙자 다리가 풀렸다. 그간의 모든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집에 도착하고 나는 삼일 동안이나 잤다.

내가 일어나자 부모님은 그간 못해주었던 것을 다 해주시려는 듯 온갖 반찬이 올려진 밥상을 차려주시고, 옷감을 끊어 새 옷을 만들어주셨다.

“아이는 우리 호적에 올릴 것이니 너는 모든 과거를 다 잊고 새로 혼인할 준비나 하거라.”

나는 부모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에서 혼기를 넘긴 양반집의 딸이 혼자 산다는 사실은 개인을 넘어 가문의 수치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부모님의 바람과 같이 되지는 않았다. 장유라는 사람은 청에 끌려갔던 며느리를 못 받아들이겠다고 하고, 승지 한이겸이라는 사람은 끌려갔던 딸이 돌아왔는데 사위가 딸 버리고 새장가 가려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정조를 잃었다는 이유로 청에서 돌아온 무수히 많은 여인네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버림받았다. 그러니 나 같은 이가 혼처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조정의 최명길이 이 문제를 거론하여 돌아온 여인네들을 구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사관은 의견을 말하기도 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

환향녀들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조정에서는 나라에서는 궁여지책으로 하나의 방편을 내 놓았다. 붙은 방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홍제천에서 몸을 씻고 오면 모든 것을 씻은 새사람으로 인정한다.’

환향녀가 속옷차림으로 홍제천 물을 건너오면 청나라에서 당한 더러움이 깨끗이 씻긴 것으로 간주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여자들이 홍체천으로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속옷차림으로 홍제천을 건너는 여자들의 모습은 왠지 서글퍼보였다. 나도 속옷차림으로 홍제천을 건너보았지만 오히려 마음만 더 무거워질 뿐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조정을 원망해본 적이 없었다. 홍제천 물에 몸을 씻으며 나는 처음으로 조정을 원망했다. 무능한 조정 때문에 아무 죄 없는 백성들이 머나먼 청나라까지 끌려갔다 와야만 했다. 조정은 그런 이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려고 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조정은 명분만을 택했다. 조정은 환향녀의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는 명분만을 택한 것이다. 홍제천에 몸을 씻은 여자들에게는 정조를 되찾은 것으로 간주한다는 뜻에서 회절(回節) 여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여자들은 전보다 더욱 낙담했다. 그것이 환향녀든 회절여인이든 결국 낙인은 지워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나라에서는 회절한 환향녀를 거부하는 집안은 중벌로 다스리겠다고 엄포했지만 양반가에서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은 환향녀들은 목을 매 죽거나 자신이 몸을 씻었던 강물에 다시 몸을 던졌다.

나는 홍제천가에 서서 물을 내려다보았다. 홍제천의 물은 슬프도록 맑았다. 이 맑은 물로도 씻기지 않을 상처라면 그 어떤 위로와 보상으로도 씻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조선의 양반이란 사람들은 위로는 고사하고 그 상처 위에 다시 낙인을 찍었다. 낙인은 상처와 함께 내 몸에 영원히 새겨져있을 것이다. 나는 결국 결심했다.

‘그래, 이 원망스러운 조선 땅을 떠나자.’

나는 부모님 몰래 집을 나와 다시 요동벌로 돌아갔다. 그곳에 가니 나와 같은 처지의 여인들이 집단촌을 살고 있었다. 대부분 양반가의 여자들이었다. 중인이나 천민들은 자신의 아내나 가족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에 무조건 감사하며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나에게 찍힌 낙인을 들춰낼 사람은 없었다. 모두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니까.

※ 사람들이 새긴 낙인은 세상의 어떤 맑은 물로도 지워지지 않는다. 아직도 홍제천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홍제천길을 지나며 홍제천 물을 내려다볼 때면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요즘의 우리도 누군가에게 낙인을 찍지 않는가.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4대문 안 길 이름),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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