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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만 생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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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정순만 생가 터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충북 청원군 옥산면 덕촌광촌길 9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05.7km
정순만 생가 터(대한민국 독립운동계의 ‘3만’) ... 충청북도 청원군 오송역에서 옥산‧오창 방향으로 가다보면 옥산 읍내 들어서는 로터리(오송‧조치원 방향을 향해 옥산 읍내에서 빠져나오는 로터리)가 나타나는데, 이 로터리에서 덕촌리 방향으로 가다보면 덕촌리 사거리 광장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 덕촌마을에서는 해마다 3월 1일, 주민들이 마을 광장이 모여 3‧1절 기념행사와 함께 단축 마라톤 대회, 민속놀이 행사 등을 해오고 있다. 작은 동네치고는 꽤 오랜 동안 역사적 행사와 공동체 전통을 계승해오고 있는 덕촌마을은 덕촌교회와 덕촌신용협동조합을 비롯한 각종 조합을 중심으로 농촌 공동체 마을의 모범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어디에 자랑해도 충분한 마을이다.
덕촌마을의 3‧1절 기념행사나 공동체 전통은 독립운동가 정순만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정순만(鄭淳萬, 1873~1911)은,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강조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무력에 의한 독립 투쟁을 펼쳤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 박용만(朴容萬, 1881~1928)과 함께 우리나라 ‘독립운동계의 3만’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정순만은 조선 말기, 개화와 외세 침략 시기에 국권회복운동과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로, 그가 태어난 곳이 바로 이곳 덕촌마을,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이다.
정순만은 독립협회 창립에 참여하고, 고향에서 덕신학교를 설립하여 구국교육에 힘썼으며, 만주로 망명하여 북간도 용정에서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민족교육과 독립사상을 주입시키고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또 신민회를 조직하고, 헤이그 특사를 돕기도 하였다. 그리고 연해주 지역에서 『해조신문』과 『대동공보』 등을 발간하는 동시에 13도의군부, 성명회, 권업회 등을 설치하여 민족계몽 및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순만은 1911년 39세의 젊은 나이에 연해주 지역 한인 사회의 갈등으로 비록 동포로부터 억울하게 살해되었지만,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큰 업적을 남겼다. 이에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정순만에 대한 연구나 그의 업적에 대한 홍보 내지 대우가 소홀한 편이다. ‘2008년 충북을 빛낸 역사‧문화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지만, 그에 걸맞은 안내나 홍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의 후손(아들)이 외국에 살고 있기 때문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현재 정순만이 태어난 곳은 잘 관리되지 않고 있으며, 이곳을 안내하는 표지판 하나 없어 일반인들이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다만, 그의 나라사랑과 항일정신이 덕촌마을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을 뿐이다.

19세기 후반, 서양 세력이 우리나라 가까이 나타나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였고, 조선 침략을 꾀하는 외국 세력 가운데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의도가 가장 강했던 일본에 의해 1876년 조․일조호조규(강화도조약)가 강제로 맺어지면서 우리나라는 결국 개항을 하게 되었다. 이후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개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개화파가 등장하였으며, 조선에 교육을 비롯한 각종 근대 시설이 보급되었다.
한편, 일본은 침략의 야욕을 더욱더 드러내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을사늑약),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차례로 맺어가면서 조선(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였다.
이에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 등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독립협회와 보안회(일본의 황무지 개간을 반대한 항일운동 단체), 신민회 등 많은 애국단체나 계몽단체들이 활동하였다. 또한 해외에서도 민족학교를 세우고, 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등 다양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런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의병운동이 충북지역에서는 크게 3단계의 시기로 나누어져 진행‧발전되었다. 제1단계의 전기 의병(을미의병)은 1896년에 위정척사운동을 이끈 이항로(李恒老)의 제자 유중교(柳重敎)의 화서학통에 연결된 유생 출신 유인석(柳麟錫)과 그 문하생 등 600여 명으로 시작되었다. 제2단계 중기 의병(을사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하여 충북 각지에서 활동이 전개되었으며, 제3단계 후기 의병(정미의병)은 1907년 군대 해산 전후로 의병에 참여하는 군인 출신자, 의병활동을 다시 일으킨 이강년(李康秊)과 김상태(金尙台), 그리고 충북과 연관 있는 사람들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1908년 이후에는 의병활동이 급속히 감소하면서 개별 의병부대가 독자적인 행동을 전개하는 형태로 전환하여 활동하였다. 이는 전술상 일본군과 대규모의 전면전이 불리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급기야 1909년의 일제의 이른바‘남한폭도대토벌’로 말미암아 상당수의 의병들은 근거지를 잃고 피신하거나 다른 형태의 독립투쟁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애국계몽운동에서 가장 기본적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운동은 충북지방에서도 마을의 지주나 선각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충북 각지에서는 신교육을 받은 사람을 중심으로 보명학교‧상산학교‧문동학교‧덕신학교‧청남학교 등이 건립되었으며, 신학문을 중심으로 계몽운동이 진행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나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국내에서 독립활동하기가 어려워지자 해외로 떠나 활동을 전개한 이들이 많았는데, 이처럼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충북 출신 인물도 적지 않았다. 충북 출신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는 신건식, 신규식, 신채호, 신팔균, 연병호, 유자명, 이상설, 전좌한, 정순만, 조동호, 황학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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