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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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선생생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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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석오이동녕기념관
  • Yidongnyeong Memorial Hall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4길 36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88.4km
이동녕 생가(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터줏대감) ... "동포여!
우리나라가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굳건한 독립을 되찾는 데는
하나는 내 동지들의 단결이요
둘은 우리 동포들의 단결이며
셋은 모든 대한 민족이 대동단결함에 있으니
오로지 뭉치면 살고 길이 열릴 것이요
흩어지면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70평생을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해 온 석오 이동녕의 어록비 내용이다. 이동녕은 한말 자주적 독립운동단체인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 이래 북간도에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신민회 활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신흥학교 설립, 대한광복군정부 수립 등 평생 쉬지 않고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국무령, 대통령 대리, 4차례의 주석 역임 등 임시정부의 요직을 두루 수행하며 우리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회복하고자 자신을 바쳤던 지도자였다.

개항 이후 열강의 침략에 맞서 독립협회가 조직되어 자주 국권과 자강 개혁, 그리고 자유 민권 운동을 전개하며 근대적 민족 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일제의 국권 피탈이 본격화되자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을 목표로 애국계몽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신민회를 중심으로 만주 지역에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새로운 근대 국가 설립을 위한 노력이 구체화 되었다. 3·1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에 맞선 우리 민족의 가열찬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널리 알렸고, 그 결실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독립 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동녕(李東寧, 1869~1940)은 1896년 독립협회에 참여했으며,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서울 상동교회에서 청년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 파기를 위해 결사대를 조직하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어 2개월 간 수감생활을 하였다.

1907년 안창호·양기탁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으며,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서간도 삼원보에서 이회영·이상룡 등과 경학사를 만들었고, 신흥강습소의 초대 교장이 되어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여 신흥무관학교로 확대·발전시켰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가 한국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3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이상설·이동휘 등과 권업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1914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는 동시에 『대동신문』·『해조신문』을 발행하였다.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 의장과 함께 국무총리로 취임하여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24년 다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겸 군무총장으로 취임하고, 이후 국무령·법무총장을 역임하다가 1927년 주석이 되었다. 1930년 김구 등과 함께 한국 독립당을 조직했고, 1930년과 1935년 임시정부 주석이 되어 1940년 사망 전까지 임시정부와 함께 하였다. 1940년 3월 중국 사천성에서 지병인 천식이 악화되어 급성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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