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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 일본 개화의 창 나가사키 데지마
1636년, 나가사키 앞바다!
일본은 왜 인공섬 ‘데지마‘를 만들었던 것일까?
4천 평의 조그만 섬, 그곳에는 일본사의 새로운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인공섬 나가사키 ‘데지마’
여인까지 바치며 조총의 기술을 확보했던 곳!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의 탄생무대가 됐던 곳!
일본 최초의 근대회사 ‘미쯔비시’가 시작된 곳!
막부 체제를 타도하고 메이지 유신을 이끌어낸 곳!
오늘의 일본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 ‘나가사키 데지마'

외래의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여 가장 빨리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일본 민족.
이 전통의 원형을 볼 수 있는 곳이 큐슈의 나가사키 항이다.
1543년 나가사키 인근에 포르투갈의 배가 표착하면서 일본의 개방 역사는 시작된다.
조총과 통일국가 완성과의 관계, 오페라 나비부인의 배경, 미쓰비시 전기의 탄생 등 지금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있는 데지마를 통해 일본이 서구사상과 문물을 개방함에 있어 어떻게 개방과 통제를 절묘하게 해나가는지 당시의 일본역사와 함께 흥미롭게 추적해 본다.

▷ 서양과의 첫 만남, 조총과 카스텔라
1543년, 우연히 표류한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일본은 조총을 얻는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서양식 신무기는 일본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총의 제작법을 알기위해 여인까지 바치며 기술을 확보했던 일본은 전국에 일본산 조총을 퍼뜨린다.
조총은 일본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조총부대는 혼란했던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총으로 한반도를 유린한다.
포르투갈이 전한 신문명은 현재 나가사키의 대표적인 음식, 카스텔라를 만들었다.
1682년,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는 우리나라 사람 최초로 카스텔라를 먹게 된다.

▷ 인공섬 ‘데지마’- 바늘구멍으로 세계를 향하다
나가사키 데지마(出島), 약 4천 평인 이곳은 1636년에 만들어진 인공섬이다.
데지마는 기독교를 전파하던 포르투갈인을 수용하기 위한 국립감옥이었다.
부채꼴 모양의 데지마에서 육지로 나갈 수 있는 통로는 오직 다리 하나뿐.
포르투갈과 무역은 하되, 봉건제에 위협이 되는 기독교의 확산을 막기 위한 일본의 전략이었다.

▷ 기독교는 No, 무역은 Yes! - 일본 막부의 이중정책
1637년, 막부의 기독교 탄압과 지역 영주의 폭정에 대항해 농민들이 봉기한다.
일본의 기독교인들까지 참여해 3만여 명이 집결했으며, 막부는 12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 겨우 진압에 성공했다.
시마바라 운젠은 농민군들의 처형장으로, 유황연기와 뜨거운 열탕의 모습이 지옥을 연상하게 한다고 해서 지옥천으로 불렸다.

▷ 일본 속 네덜란드‘나가사키’
기독교도들의 반란으로 포르투갈은 일본에서 완전히 추방된다.
일본은 네덜란드와 새로운 무역 거래를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망원경, 지구본, 시계 등 첨단 물품 뿐만 아니라
서양의학과 과학지식을 보급했다.
나가사키에는 당시 네덜란드인이 거주했던 1만평의 이국적인 정원과 서양식 저택들이 하나의 공원을 이루고 있다.

▷ 일본 근대화의 싹, 난학(蘭學)
1774년에 출간된 해체신서는 일본열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해체신서는 일본 최초의 의학 번역서로, 일본인 의사였던 스키타 겐파쿠가 서양해부학서를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다.
해체신서로 시작된 난학(蘭學) 열풍은 천문학, 물리학, 군사학 등 다른 분야로 확산됐다.
나가사키는 서양 지식의 핵으로 일본 지식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800년대 초, 난학 전문가들의 수는 천명을 넘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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