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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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길
A
- ~2.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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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 외국인들도 열광하는 예술과 골동품의 아이콘서울의 대표 거리는 여전히 인사동이다. 옛날만큼은아니더라도 그 명성은 아직 바래지 않았다. 변함없이가장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거리가 인사동이요,스타벅스의 간판마저 영어가 아닌 한글로 바꿔버릴만큼 그 전통이 깊숙이 뿌리 내린 동네이기도 하다.인사동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대사동과 이문동,수전동 등을 통합해 만들었다. 종로통과 인접해일제강점기 말부터 골동품 상가가 밀집해 있었으니골동품 거리의 역사만도 족히 반세기는 훌쩍뛰어넘는다. 과거에는 종로에서 태화관길과 만나는곳을 인사동이라 했으나, 근래에는 종로2가 낙원상가입구에서 안국사거리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3.1운동 때 민족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태화관도 이제는 태화빌딩으로 바뀌었지만,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승동교회는 그 증인처럼자리한다. 1970년대는 가짜 고서화 사건과 중과세 조치등이 더해지면서 골동품상들이 대거 이동했고화랑들이 들어서기 시작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지금 인사동 거리는 골동품상을 중심으로 화랑과갤러리가 다수 자리한다. 그리고 골목 안쪽으로는 전통맛집들이 즐비하다. 인사동 갤러리도 사간동으로, 다시강남 쪽으로 대다수 이전했지만 여전히 예술과골동품의 거리로 각광받는다. 근래에는 전통 공방과갤러리 등이 모여 인사동의 신명물로 등장한 쌈지길과가나아트스페이스, 경인미술관, 목인박물관, 아름다운차박물관 등 신구의 명소들이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지형도를 그려가고 있다.<인사동길, 가상 투어 파노라마>360도 회전 입체 영상으로, 마우스나 키보드의 화살표키를 이용해 확대, 축소가 가능합니다.인사동에서 꼭 둘러볼 곳1. 쌈지길인사동의 고유한 색깔을 바탕으로 2004년 문을 연새로운 전통 문화 쇼핑 공간. [자세히 보기]2. 목인박물관국내 유일의 목조각상 전문 사립 박물관으로 재미있는민속 목조각상이 전시되어 있다. [자세히 보기]3. 갤러리룩스1999년 문을 연 인사동 최초의 사진 전문 갤러리. 다양한사진 작품을 만날 수 있다.[자세히 보기]4. 토토의 오래된 물건1970~80년대의 학용품, 장난감, 생활 용품 등 추억의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는 이색 박물관. [자세히 보기]5. 경인미술관전통 한옥 미술 전시관과 전통 다원, 아틀리에를 갖춘,도심 속 쉼터로 자리 잡은 문화 공간. [자세히 보기]* 다채로운 전통 액세서리들이 눈길을 끈다.* 고려 말 학자 우탁의 한손에 막대 잡고가 새겨진 인사동 거리 쉼터* 인사동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한국 관광의 일번지다.* 길거리의 좌판 또한 인사동 문화의 일부* 한글 간판을 내건 스타벅스는 세계에서 인사동이 유일하다.* 한지백화점 예촌은 인사동 길찾기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종로3가 쪽 인사동 사거리 전경* 인사동은 간판들의 이름만으로도 전통의 냄새가 물씬 풍겨난다.* 외국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서울의 거리 인사동* 율곡로와 만나는 인사동 끝자락 서 있는 석장승이 한국의 멋을 더한다.피맛골 | 골동품 | 외국인 | 전통 |공간개요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대사동과 이문동, 수전동 등을 통합해 만든 인사동은 종로통과 인접해 일제강점기 말부터 골동품 상가가 밀집했던 곳이다. 1970년대는 가짜 고서화 사건과 중과세 조치 등이 더해지면서 골동품상들이 더 많이 이동해 왔고 화랑들이 들어서기 시작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골목 안쪽으로는 전통 맛집들이 즐비하다. 한국의 전통적인 맛과 멋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라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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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30.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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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1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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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국립공원
- ~7.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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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성북구 정릉동
- 1년 내내 새 코스를 발견하는 재미 북한산국립공원은 산성 주능선, 우이능선, 비봉능선, 형제능선, 의상능선, 진달래능선 등 수많은 능선과 계곡이 펼쳐져 있어 1년 내내 오르내려도 늘 새롭다. 아담한 오솔길부터 실개천이 흐르는 호젓한 등산로, 초보자는 쉽사리 발을 떼놓기 힘든 험한 암벽 코스까지 다양한 산행 코스가 등산객을 기다리고 있다. 산행은 주로 구기동, 효자동, 우이동, 정릉동, 세검정 등을 출발점으로 이뤄진다. 이 가운데 북한산에 처음 오는 등산객도 쉽게 오를 수 있는 코스는 북한산성 코스다. 구파발역 근처 북한산성 매표소를 통해 정상인 백운대로 가는 코스로 길이 험하지 않고 3시간이면 오르내릴 수 있다. 북한산에서 가장 넓은 계곡으로 물소리를 들으며 지친 다리를 달래고 경치를 즐기기에 좋다. 아이와 함께라면 평창동에서 시작하는 형제봉 코스를 권할 만하다. 바윗길이 있지만 가파르지 않고, 형제봉만 무사히 넘으면 이후로는 편안한 산책길이 이어진다. 가족끼리 쉬엄쉬엄 산행하기에 적당하다. 하산길을 정릉으로 잡으면 북한산의 생태와 역사를 알 수 있는 전시장, 자연 학습 관찰로를 만날 수 있다. 쉬어 가면 더 좋은 산 구기계곡을 끼고 오르는 탐방로는 매년 10만 명의 탐방객이 찾아드는 인기 탐방 코스다. 승가사나 대남문으로 갈 수 있는데, 대남문 문루에 올라가 한숨 돌리면서 조망의 유희를 즐길 수 있다. 훤칠하게 솟아오른 백색의 화강암 능선이 물결을 이룬다. 비봉 코스는 작은 오솔길 양옆으로 실개천이 흘러 혼자 오르기에 좋은 코스. 비봉으로 오르는 길에 진흥왕순수비가 오롯이 세워져 있다. 우이동 코스의 노적봉은 북한산의 가운데에 솟아 있어 웅장한 백운대와 주위를 둘러싼 주능선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돌양지꽃, 자주꿩의다리, 바위채송화 등 보기 힘든 야생화들이 피어 있어 걸음을 멈추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도 곳곳에서 보이는데, 제법 규모가 큰 절인 노적사에 들러 잠깐 목을 축일 수 있다. 이 외에도 4월 중순이면 분홍빛 물결이 넘실거리는 진달래능선, 유원지의 분위기 없이 깊은 산 속에 들어선 듯한 일선사 ~ 대성문 산길 등 잠깐 도심에서 벗어나 자연의 향취를 실컷 마실 수 있는 코스가 사계절 내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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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동대문)
- ~3.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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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종로구 종로6가
- 한성부의 동쪽을 지키던 큰 대문보물 제1호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던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서울 성곽의여덟 성문 가운데 동쪽의 큰 대문에 해당한다.동대문이라는 이름도 거기서 기인했다.흥인(興仁)은 어진 마음을 북돋운다는 뜻으로유교사상의 첫 번째 덕목인 인(仁)을 뜻한다. 다른4대문과 달리 네 글자의 현판이 독특한데 도성의 동쪽방면이 텅 비어 있어 ‘의’에 해당하는 지(之)자를넣어 무게감을 주었다고 한다.흥인지문은 남쪽의 큰 대문인 숭례문과 마찬가지로조선 초기에 창건했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됐고50여 년이 지난 문종 원년(1451년)과 단종원년(1453년)에는 일부 보수 작업을 진행했다. 그 후400여 년이 지난 고종 5년(1868)에 동대문 전체가 썩어지탱하기 어려워지자 전면적으로 개수 공사를시작했다. 문루가 매우 낮아 문지를 8척 돋우고 그 위에새로 홍예(虹霓)를 쌓고 초루(譙樓)를 중건했다. 공사는1년 동안 진행돼 고종 6년(1869)에 완공됐다.그 후 일제강점기(1934년)를 거치면서 일본에 의해동대문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재 지정이 됐고 오랫동안그리 불려왔다. 그러다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일환으로 재평가 작업을 통해 본래의 이름인흥인지문을 회복했다.<흥인지문, 가상 투어 파노라마>360도 회전 입체 영상으로, 마우스나 키보드의 화살표키를 이용해 확대, 축소가 가능합니다.섬세하고 화려한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흥인지문은 중앙에 홍예문을 두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중층문루를 세워 지은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에서 볼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으로 되어 있다. 사래끝에는 토수를, 추녀 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용마루양끝에는 취두를 올려 왕성의 대문으로 손색이 없다.기둥 위의 공포는 다포양식이다. 모양새가 가늘고연약해 보이며 장식이 강조된 것이 조선 후기 양식을잘 드러낸다.흥인지문은 다른 문과 달리 옹성이 있는 것도 큰특징이다. 옹성은 곡성(曲城) 또는 치성(雉城)이라고하는데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도록 성문을 둘러쌓은작은 성을 말한다. 형세가 낮고 평탄해 적으로부터공격을 받을 수 있는 지형적 약점을 보완하고, 반대로적을 공격하기에 용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흥인지문은 조선 후기의 섬세하고 화려한 아름다움을지닌 문화재로 현재는 좌우의 성벽이 모두 헐러져 나가도로 가운데 성문만 남았다. 하지만 숭례문 화재이후에 그 소중함이 한층 더해진 우리네 문화재다.* 흥인지문의 역사를 설명하는 안내판* 처마를 4면에 두는 우진각 지붕을 이고 있다.* 보물 제1호인 흥인지문* 흥인지문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다.* 태조 7년(1398)에 완성했으나 현재의 문은 고종 6년(1869)에 다시 지었다.* 바깥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반원 모양의 옹성(饔城)을 쌓았다.공간개요 보물 제1호 흥인지문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다. 현존하는 흥인지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성문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흥인지문의 도성은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다.유적지 지정 보물 제1호지정 내역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 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도성을 쌓을 때 같이 짓기 시작하여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다. 흥인지문은 도성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문화재다.소요시간30관리기관 종로구청 문화체육과관광팁 야간 출사 흥인지문은 출사 장소로 사랑받는 곳 중 하나다. 낮보다는 주변 쇼핑타운의 현란한 네온사인과 함께 이색적인 풍경이 연출되는 야간 촬영에 더욱 좋다. 동대문 쇼핑타운 흥인지문 바로 옆에는 동대문 쇼핑타운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시장으로 의류, 액세서리, 혼수용품, 원단, 의류 부자재 등 패션의 모든 것이 모여 있는 곳이다. 국내는 물론 국제적인 쇼핑의 명소로 365일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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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 ~1.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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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 이용시간
[하절기(3~10월)]
평일 09:00~20:00 / 토,일,공휴일 09:00~19:00
[동절기(11~2월)]
평일 09:00~20:00 / 토,일,공휴일 09:00~18:00
※ 기획전시의 관람시간은 전시에 따라 다를 수 있음
※ 입장은 마감시간 1시간 전까지
쉬는날 매년 1월 1일, 매주 월요일, 그외 시장이 정하는 휴관일
관람소요시간 상설전시 1시간 30분~2시간
서울 신문로변 경희궁터 98,466㎡ 가운데 경희궁 유적이 발굴되지 않은 22,809㎡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서울역사박물관이 2002년 5월 21일 개관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서울의 역사·문화를 정리하여 보여주는 도시역사박물관이다. 이로써 한반도 역사의 중심무대였던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투영하여 서울시민들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하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또한, 월드컵을 계기로 세계적인 대도시로 도약하는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널리 알리고 문화유산을 수집, 보존, 연구, 전시하는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 하여, 서울시민 개개인에게는 자긍심과 소속감을, 외국인에게는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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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
- ~3.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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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종로구 누상동
- 한양도성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둘러쌓은 도시성곽이다. 역사 속의 모든 도시들이 으레 그러했듯이 조선 제일의 도시 한양도 성곽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지방 도시들도 성곽을 두르고 있었지만 한양은 궁궐과 종묘 사직이 있는 도읍이기 때문에 한양을 둘러싼 성곽을 도성이라 불러 그 격을 높였다. 한양도성은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도시 한양을 더욱 도읍답게 만들었다.
한양은 나라를 대표하는 도시이기에 충분한 면적이 필요했고 안전하게 보호되어야 했다. 도시의 주요 시설은 한양의 분지에 두고 분지를 두른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을 쌓았다. 산위에 쌓는 산성의 장점을 이용하여 산과 산을 연결한 도성은 지형의 이점을 살려 도시를 건설한 고구려 때부터의 전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구세력과 단절하고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려 하였다. 한양은 국토의 중심에 위치하고 강과 연결되어 수운과 교통에 편리한 점,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탄하여 도읍이 될 만했다. 한양도성은 태조 5년 1월 9일 부터 2월 28일 까지, 8월13일부터 9월 30일 까지 2회에 걸쳐 전국 백성 199,260명을 불러들여 축성공사를 벌였다. 태조 때 짧은 기간 동안 쌓은 도성은 세종 때에 이르러 새롭게 단장되었다. 전국에서 백성 322,400명과 기술자 2,211명, 수령과 인솔자 115명을 불러들여 전구간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완성된 도성은 험한 곳이 16척, 그 다음이 20척, 평지는 23척의 높이였다. 전국에서 백성을 불러들인 기록은 각자성석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완성된 도성은 유교적 이념에 근거한 상징체계로 치장되었다. 도성 3대문인 숭례문(崇禮門), 흥인지문(興仁之門), 돈의문(敦義門)은 유가에서 사람의 다섯 가지 덕목[五常]으로 꼽는 인·의·예·지·신에서 글자를 따서 이름 짓고 정북문은 숙청문(肅淸門)이라 따로 지어 불렀다. 그 밖의 문들은 동북문에는 홍화문[弘化門, 교화를 넓힘], 동남문에는 광희문[光熙門, 널리 빛냄], 소북문에는 소덕문[昭德門, 덕을 빛냄], 서북문에는 창의문[彰義門, 바름을 펼침]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불렀다. 전 세계 수많은 도시들이 성곽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날 까지 성곽을 유지하고 있는 도시는 극히 드물다. 산업화에 따른 도시의 팽창과 교통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성곽의 파괴를 불러왔다. 다른 나라의 도시성곽들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도로와 철도건설로 대부분 헐려나간다. 한양도성은 일제에 의한 성곽파괴의 역사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상당부분이 잘 남아있다. 현재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구간은 12,771m이다. 한양도성 전체길이 18,627m으로 볼 때 70%가까이 남아있는 셈이다. 천만 명이 모여 살아가는 대도시 속에서 이토록 보존상태가 좋은 도시성곽을 보유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한양도성은 자연을 이용하여 도시를 건설한 뛰어난 사례로, 한국인의 전통적 지혜와 합리적 사고가 빚어낸 세계적 걸작이다. 서울은 600년의 역사를 간직한 한양도성이 있어 자연속의 도시경관과 도시속의 역사공간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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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
- ~2.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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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 서울 최초의 근대 공원`종로’ 하면 떠오르는 탑골공원. 그러나 익숙한 만큼자세히 알지 못하는 곳. 서울 각지에서 모인 노인들의휴식 공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19년 3월 1일로기억되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귓가에 아련한‘기미년 3월 1일 정오’는 3.1 운동의 발상지로서탑골공원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원래 원각사 터였던 이곳은 1897년 대한제국 고종 때영국인 고문인 브라운의 건의에 의해 서구식 공원으로건립됐다. 파고다공원이라 오랫동안 불리다 1992년 옛지명을 따라 탑골공원으로 바뀌었다.탑골공원의 정문은 삼일문이다. 문을 지나면 곧장 민족대표 33인의 대표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과 대한독립선언을 기념한 3.1 독립선언 기념탑이 보인다. 공원가운데에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팔각정이 있고 그주변으로 유적들이 배치되어 있다.국보 제2호를 만나다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도 보인다. 조선 세조13년(1467)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는 12m이며 각층에불회도상, 인왕상, 불좌상과 화초, 동물 모양 등으로양각되었으며 원각사의 불상에서 분신한 사리와원각경을 봉인하고 있다. 형태와 평면이 특수하고화려하며 훌륭한 걸작품으로 꼽힌다. 이곳에 국보제2호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탑골공원 내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곳이며 외국인들의 발걸음이 멈추는 곳이기도하다.그 외에도 대원각사비, 조선 초기의 해시계인 앙부일구받침돌 등의 문화재와 만해 한용운 선사비, 3.1 정신찬양비가 세워져 있다. 담장 쪽으로는 3.1 운동 기념부조들이 펼쳐져 있는데 동판 부조만 봐도 당시의생생한 현장이 느껴질 만큼 섬세하게 제작되었다.공원의 외곽부에는 돌로 제작된 벤치와 꽃길이 아담한분위기를 낸다.탑골공원에서 이제 독립만세의 함성은 들리지 않는다.노인들이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거나 가끔씩 젊은연인들이 데이트를 한다. 하지만 그날의 의미는 변하지않는다. 도심과 가까우니 종로에 나섰다면 아이들과함께 찾아보고 그 숭고한 희생을 떠올리는 것도 좋을듯하다.* 흔히 볼 수 있는 기념비와는 달리 거북 받침대와 연꽃을 든 용머리 장식이 세밀하며 독특하게 조각되었다.* 보호각 안에 자리한 보물 제3호 대원각사비. 원각사의 내력이 기록된 기념비로 1471년 제작되었다.* 종로2가에 있는 탑골공원의 정문인 삼일문. 현판은 독립선언서의 글자를 따서 만들었다.* 알록달록한 단청으로 칠해진 기와 밑에 탑골공원의 유래와 공원 내부 안내도가 설명되어 있다.* 1762자로 구성된 거대한 규모의 3.1 운동 기념비는 1980년 제작되었다.* 3.1 운동 기념비 아래서 쉬고 있는 외국인 관광객들* 동판으로 제작된 3.1 운동 기념 부조물로 전국의 독립운동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국보 제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공간개요 탑골공원은 고려 시대 흥복사(興福寺)가 있던 자리로 조선 시대 원각사(圓覺寺)라 개칭하고 중건했다. 1897년 영국인 브라운이 그 터에 서울 최초의 근대 공원을 설계했다. 현재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과 여러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또한 그 못지않게 1919년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3.1 운동의 발상지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1991년 사적 제354호로 지정됐다. 파고다공원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나 1992년 옛 지명을 따라 탑골공원으로 이름을 바꿨다.이용시간 09:00 ~ 18:00이용시설 원각사지10측석탑, 팔각정, 3.1운동기념탑, 손병희선생 동상, 한용운선생기념비, 우물, 편의시설 등유적지 지정 사적 제354호지정 내역 탑골공원은 사적 제354호로 서울 최초의 근대 공원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세조 때 원각사로 중건하였던 것을 고종 34년인 1897년 재무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에 따라 현대식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1919년 3.1 운동의 발상지로 청년 학도와 애국 시민이 이곳에 모여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곳이다. 1992년 5월 28일 공원 명칭을 파고다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시설로는 독립운동 봉화에 불을 당겼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 보물 제3호인 대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 운동 기념탑, 3.1 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관리기관 탑골공원 관리사무소관광팁 3.1절 독립운동 기념식 : 매년 종로구에서는 3.1절 독립운동 기념식 및 거리 축제가 개최된다. 당시의 상황을 재연하기 위해 한복을 입고 태극기를 든 사람들과 함께 종로구를 행진해보자. 애국 선열들의 뜻을 기리고 직접 참여해보는 의미 있는 날이 될 것이다. 3.1 독립운동 기념식 및 거리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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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문화센터
- ~2.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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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종로구 계동
- 전통적인 북촌 한옥마을을 한눈에 보다북촌 한옥마을을 둘러보기 전에 먼저 다양한 정보를얻을 수 있는 북촌문화센터를 찾아가보자.북촌문화센터는 본래 조선 말기 세도가의 집인민재무관댁 한옥에 들어섰다. 민재무관댁은 창덕궁후원의 연경당을 본떠 지었다. 민재무관댁 며느리였던이규숙 씨가 반가 음식에 대해 구술한 책 ‘이계동마님이 먹은 여든 살’로 인해 계동마님댁으로도잘 알려져 있다. 이곳을 서울시가 매입해 북촌주민들이 한옥마을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홍보 전시관과 함께 다양한 전통 문화 강좌 및 전시를기획하는 문화 사랑방으로 가꿔왔다.풍수지리적으로 서울에서 으뜸인 경복궁과 창덕궁사이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고풍스러운 마을인 북촌.양반들이 터를 일궈 전통 기와집들이 늘어선 북촌한옥마을의 역사부터 현재의 모습까지 한번에 볼 수있는 곳이 북촌문화센터다. 안으로 들어서면아담하지만 겹겹이 펼쳐진 기와집에서‘계동마님댁’의 풍모가 그대로 느껴진다.전체적으로 안채, 바깥채, 앞행랑채, 뒤행랑채, 사당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을 최대한 한옥 원형을보존하고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어 개보수했다.뒤행랑채였던 홍보 전시관에는 북촌의 역사와 가치를홍보하는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또 북촌 보존의중요성을 알리는 영상물도 상영하고 있다. 북촌의곳곳에 산재한 문화재와 전통 문화를 체험하는 북촌투어에 관한 다양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홍보 전시관옆에 있는 안채에는 한옥문화과 사무실, 한옥리모델링에 관련된 정보 서비스와 상담을 하는 수선상담실, 사랑방이 있어 방문객들을 편하게 맞아준다.주민들이 담소를 나누는 사랑방북촌문화센터의 사랑방은 점심 시간을 이용해주민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회의실에서는전통 문화 관련 행사를 진행하기도 하고 원래사당이었던 안채 뒤의 아담한 정자에서는 편안한휴식을 취할 수 있다. 단아한 한옥의 정취를 느끼며 차한잔 나누는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정자를 돌아안쪽으로 자리한 앞행랑채에는 전통 문화를 향유할 수있는 문화 센터가 마련되어 있다.문화 센터에서는 한문 서예, 실용 민화, 전통 다례,매듭 공예, 전통 자수, 전통 보자기, 칠보, 전통 한지공예를 포함한 전통 문화 강좌 등을 제공하고 있다.또한 영화 상영, 연주회, 전시회 등 다양한 문화 행사와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북촌의 역사와 문화재를안내하는 역할을 하면서 북촌의 정겨운 모습을오래도록 보존하고 한국 전통 주거에 대한 의미를전하는 곳. 북촌문화센터는 이웃들과 아름다운 전통을나누는 북촌의 사랑방이자 훌륭한 문화 소통 공간이다.* 민재무관댁의 뒤행랑채였던 공간은 홍보 전시관으로 쓰고 있다.* 웃자란 향나무 한 그루가 북촌문화센터의 수문장처럼 자리한다.* 북촌문화센터를 방문한 시민들이 북촌 역사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북촌문화센터는 조선 말기 세도가의 집인 민재무관댁에 들어섰다.* 북촌문화센터에서는 한문 서예, 실용 민화, 매듭 공예 등 다채로운 전통 문화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을 본떠 지은 북촌문화센터* 한옥의 처마 아래 장독들이 예스러운 운치를 더한다.* 북촌문화센터에서는 북촌 한옥마을 나들이의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공간개요 북촌문화센터는 북촌 한옥마을에 대한 자긍심을 키우고, 수준 높은 전통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위해 2002년 개관했다. 본래 조선 말기 세도가 인 ´민재무관댁´으로 ´계동마님댁´으로도 유명하다. 안채, 바깥채, 앞행랑채, 뒤행랑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한옥 원형을 보존하고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어 개보수했다. 한국의 전통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다양한 정보와 함께 전통 문화 강좌 및 전시회 등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이용시간 각 강좌별로 다름 오전 09:30 ~ 12:30 오후 14:00 ~ 17:00 야간 19:00 ~ 21:30휴무일 매주 일요일부대시설 홍보 전시관, 안방, 별당, 사무실, 사랑방 외한국어 안내 다양한 문화 강좌 프로그램 3개월 과정 사전 예약 필요외국어 안내 서울시 북촌 한옥마을 관람 프로그램 도보 관광 코스 문의 02-2171-2459 혹은 홈페이지에서 신청 가능 영어, 일본어, 중국어관리기관 서울시 한옥문화과관광팁 북촌 한옥마을 안내서 북촌문화센터에 가면 북촌의 가장 아름다운 곳을 감상할 수 있는 북촌팔경의 포인트와 북촌을 자세히 안내해주는 가이드북이 있다. 또 북촌 한옥에 대한 이해를 돕는 안내서가 마련되어 있으니 본격적인 북촌 한옥마을 투어에 나서기 전에 참고하면 좋다. 전통 문화 강좌, 전시회 등 촬영지 북촌문화센터 근처의 계동길에는 배용준, 최지우 주연의 드라마 촬영지였던 중앙고등학교와 ‘유진의 집’이 있다. 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 장소다. 북촌문화센터와 북촌 한옥마을을 돌아다니다 시간이 된다면 잠시 들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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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클럽골목
- ~4.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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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마포구 상수동
- 외국인들도 열광하는 축제의 밤홍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젊음과클럽이다. 클럽은 이제 홍대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젊은이들 사이에서 홍대로 놀러가자는 말은 곧클럽에 가자는 말로 통한다. 홍대 주변의 클럽들은색다르게 즐길 수 있는 언더그라운드 공간으로유명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웬만한외국인들 역시 홍대 클럽의 명성을 한국인들보다도 더잘 알고 있다. 홍대 클럽의 역사는 1990년대 초로 거슬러올라간다. 그 이전까지는 록카페가 대세였다. 초기마니아들이 즐겨 찾던 클럽은‘상수도’나‘발전소’였지만 지금은 문을 닫았다. 1990년대중반부터 엠아이(M.I)와 조크레드(Jokerred),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현재는 코스모로 바뀐 곳),마트마타(Matmata, 현재는 M2로 바뀐 곳) 등이 손에꼽혔다. 음악도 록, 하드코어, 모던록에서 테크노까지다양한 장르를 들을 수 있었다.클럽이 대중화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유명 클럽을찾기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클럽을찾는다. 클럽 역시 자신들의 색깔을 찾아 진화했다.인대 밴드의 라이브 클럽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인디 밴드의 음악과 거친 숨소리가 뒤섞인 공간에서사람들은 열광적으로 몸을 흔들고 땀을 흘린다. 록밴드중심으로 공연하는 사운드 홀릭이나 펑크, 하우스밴드위주의 스팟, 재즈 마니아 사이에서 유명한 클럽워터콕 등이 있다.대형 클럽과 인디 클럽, 선택은 자유다. 다양한 클럽과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홍대는 진짜 놀 줄 아는사람들로 언제나 축제 분위기다.<홍대 거리, 가상 투어 파노라마>360도 회전 입체 영상으로, 마우스나 키보드의 화살표키를 이용해 확대, 축소가 가능합니다.홍대 클럽 골목에서 꼭 둘러볼 곳1. 홍대 클럽의 대표주자 NB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이 운영하는 클럽으로유명세를 탄 곳이다. 정통 힙합 스타일의 음악을 들을수 있다. 주말에는 TV에서 방금 뛰쳐나온 듯한스타일리시한 힙합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문의02-326-1716)2. 일렉트로닉 마니아들이 사랑한 클럽 M2일렉트로닉 음악을 전문으로 한다. 음향과 조명,비주얼 3박자를 완벽하게 갖춘 클럽으로 큰 바와 대형무대로 구분되어 있다. VIP를 위한 특별 공간이 마련돼있다. (문의 02-3143-7573)3.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국악 선율, 클럽 조커레드국악 소리가 들려오는 클럽이 있다. 조커레드다. 매주셋째 주 토요일마다 타악 그룹 노름마치가 홍대 클럽조커에서 국악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젊은이들에게국악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소통할 수 있는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공연이다.(문의 02-325-4068)4. 초보자도 편하게, 클럽 사브다른 클럽과는 다르게 입구에 DJ 부스가 있다. 힙합음악과 하우스 음악을 동시에 들을 수 있는 곳이다.클럽 내부는 좌우로는 약간 좁고 전후로 긴 구조다. DJ박스가 오픈되어 있어서 원하는 음악도 맘대로 들을 수있다. (문의 02-324-6929)* 홍대 어느 라이브 클럽 입구의 전경* 줄을 서서 클럽 입장을 기다리는 젊은이들* 흥겨운 음악과 리듬을 즐기는 클러버들의 모습* 클러버들 사이에 입소문난 맛집 삼거리 포차* 금요일이면 홍대는 축제의 장으로 변한다.* 홍대 힙합 클럽 벨벳 바나나의 공연 모습* 전통 흑인 음악인 힙합을 들을 수 있는 클럽 디디(DD)* 홍대 클럽 골목에는 클럽과 바들이 함께 어우러져 자리한다.* 바깥으로 테라스를 낸 바도 많다.NB | 인디 밴드 | 클럽데이 | 홍대 클럽 골목 |공간개요 홍대 클럽은 홍대 문화의 상징이다. 1990년대 초 라이브 카페 중심으로 마이너 문화의 진수를 보여줬고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춤과 음악이 하는 클럽 문화까지 가세했다. 물론 여전히 라이브 클럽들의 활동도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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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 ~1.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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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 왕맥이 흐르는 터 ‘서울역사박물관 뒤편에 있는 궁궐’이라 부르는 경희궁. 조선 왕조의 이궁(離宮)이요, 조선의 5대 궁궐이라지만 여전히 무명(無名)이다. 풍모 또한 결코 그 위상과 같지 않다. 서울의 대표 도심인 신문로와 접한 터임에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경희궁의 터가 서울역사박물관을 아우를 만큼 너른 땅이었음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경희궁은 1623년 광해군이 지었다. 건립 당시만 해도 230만 제곱미터가 넘는 부지에 1500칸에 이르는 대궐이었다. 광해군 이후 철종 때까지 이궁으로 사용했으며 전각만도 100여 동이 넘었다. 광해군이 경희궁을 지은 데는 사연이 있다. 경희궁은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었다. 하지만 그 터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말이 돌자 광해군이 이를 몰수해 궁궐을 지은 것이었다. 인조반정(1623)으로 광해군은 폐위되고 뒤를 이어 인조가 왕위에 올랐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지리가 현실이 된 셈이다. 경희궁은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렀으나 영조대에 이르러 지금의 이름인 경희궁(慶熙宮)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고난과 역경의 일제강점기 경희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가장 철저하게 파괴됐다. 일사늑약(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부터다. 학교를 세우기 위해 궁궐 내의 건물을 철거했고 이를 위해 땅의 지형도 바꿨다. 또한 경희궁 터의 8만2500㎡에는 전매국 관시를 지었고 전각들도 대부분 팔아버렸다. 초창기에는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화문, 황학정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화재(1829 순조 29년)로 소실되고 나머지 전각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숭정전과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각각 옮겨졌다. 1988년 복원 작업에 착수한 후에야 몇몇 전각의 이전 작업이 추진됐다. 경희궁의 흥화문도 이때 이전 복원했다.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과 똑같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기념한 박문사(博文寺)를 장충동에 지으며 절문으로 흥화문을 옮겨 사용한 탓이다. 해방 후에는 신라호텔의 영빈관 정문으로 쓰이다 경희궁으로 돌아왔다. 경희궁 내 흥화문의 현 위치도 창건 당시의 자리는 아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에는 금천교가 있다. 금천교는 보통 궁궐의 정문 안쪽에 세우는 다리다. 이로 보아 그 앞쪽에 흥화문이 자리했을 것이다. 지금의 구세군회관에 해당해 어쩔 수 없이 현재의 자리에 들어섰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현재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이 낡고 이전의 어려움이 있어, 현재의 경희궁 숭정전은 새롭게 지어 복원했다. 국왕이 공무를 수행하던 자정전과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태령전도 새로이 복원했다. 경희궁은 2002년 일반인들에게 개방한 뒤로 21세기의 후손들과 함께 다시금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이후 조금씩 궁궐의 위용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어떤 모습으로 옛 위상을 회복할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우리의 문화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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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길
A
- ~2.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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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 외국인들도 열광하는 예술과 골동품의 아이콘서울의 대표 거리는 여전히 인사동이다. 옛날만큼은아니더라도 그 명성은 아직 바래지 않았다. 변함없이가장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거리가 인사동이요,스타벅스의 간판마저 영어가 아닌 한글로 바꿔버릴만큼 그 전통이 깊숙이 뿌리 내린 동네이기도 하다.인사동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대사동과 이문동,수전동 등을 통합해 만들었다. 종로통과 인접해일제강점기 말부터 골동품 상가가 밀집해 있었으니골동품 거리의 역사만도 족히 반세기는 훌쩍뛰어넘는다. 과거에는 종로에서 태화관길과 만나는곳을 인사동이라 했으나, 근래에는 종로2가 낙원상가입구에서 안국사거리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3.1운동 때 민족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태화관도 이제는 태화빌딩으로 바뀌었지만,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승동교회는 그 증인처럼자리한다. 1970년대는 가짜 고서화 사건과 중과세 조치등이 더해지면서 골동품상들이 대거 이동했고화랑들이 들어서기 시작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지금 인사동 거리는 골동품상을 중심으로 화랑과갤러리가 다수 자리한다. 그리고 골목 안쪽으로는 전통맛집들이 즐비하다. 인사동 갤러리도 사간동으로, 다시강남 쪽으로 대다수 이전했지만 여전히 예술과골동품의 거리로 각광받는다. 근래에는 전통 공방과갤러리 등이 모여 인사동의 신명물로 등장한 쌈지길과가나아트스페이스, 경인미술관, 목인박물관, 아름다운차박물관 등 신구의 명소들이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지형도를 그려가고 있다.<인사동길, 가상 투어 파노라마>360도 회전 입체 영상으로, 마우스나 키보드의 화살표키를 이용해 확대, 축소가 가능합니다.인사동에서 꼭 둘러볼 곳1. 쌈지길인사동의 고유한 색깔을 바탕으로 2004년 문을 연새로운 전통 문화 쇼핑 공간. [자세히 보기]2. 목인박물관국내 유일의 목조각상 전문 사립 박물관으로 재미있는민속 목조각상이 전시되어 있다. [자세히 보기]3. 갤러리룩스1999년 문을 연 인사동 최초의 사진 전문 갤러리. 다양한사진 작품을 만날 수 있다.[자세히 보기]4. 토토의 오래된 물건1970~80년대의 학용품, 장난감, 생활 용품 등 추억의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는 이색 박물관. [자세히 보기]5. 경인미술관전통 한옥 미술 전시관과 전통 다원, 아틀리에를 갖춘,도심 속 쉼터로 자리 잡은 문화 공간. [자세히 보기]* 다채로운 전통 액세서리들이 눈길을 끈다.* 고려 말 학자 우탁의 한손에 막대 잡고가 새겨진 인사동 거리 쉼터* 인사동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한국 관광의 일번지다.* 길거리의 좌판 또한 인사동 문화의 일부* 한글 간판을 내건 스타벅스는 세계에서 인사동이 유일하다.* 한지백화점 예촌은 인사동 길찾기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종로3가 쪽 인사동 사거리 전경* 인사동은 간판들의 이름만으로도 전통의 냄새가 물씬 풍겨난다.* 외국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서울의 거리 인사동* 율곡로와 만나는 인사동 끝자락 서 있는 석장승이 한국의 멋을 더한다.피맛골 | 골동품 | 외국인 | 전통 |공간개요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대사동과 이문동, 수전동 등을 통합해 만든 인사동은 종로통과 인접해 일제강점기 말부터 골동품 상가가 밀집했던 곳이다. 1970년대는 가짜 고서화 사건과 중과세 조치 등이 더해지면서 골동품상들이 더 많이 이동해 왔고 화랑들이 들어서기 시작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골목 안쪽으로는 전통 맛집들이 즐비하다. 한국의 전통적인 맛과 멋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라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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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30.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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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1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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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문화센터
- ~2.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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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종로구 계동
- 전통적인 북촌 한옥마을을 한눈에 보다북촌 한옥마을을 둘러보기 전에 먼저 다양한 정보를얻을 수 있는 북촌문화센터를 찾아가보자.북촌문화센터는 본래 조선 말기 세도가의 집인민재무관댁 한옥에 들어섰다. 민재무관댁은 창덕궁후원의 연경당을 본떠 지었다. 민재무관댁 며느리였던이규숙 씨가 반가 음식에 대해 구술한 책 ‘이계동마님이 먹은 여든 살’로 인해 계동마님댁으로도잘 알려져 있다. 이곳을 서울시가 매입해 북촌주민들이 한옥마을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홍보 전시관과 함께 다양한 전통 문화 강좌 및 전시를기획하는 문화 사랑방으로 가꿔왔다.풍수지리적으로 서울에서 으뜸인 경복궁과 창덕궁사이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고풍스러운 마을인 북촌.양반들이 터를 일궈 전통 기와집들이 늘어선 북촌한옥마을의 역사부터 현재의 모습까지 한번에 볼 수있는 곳이 북촌문화센터다. 안으로 들어서면아담하지만 겹겹이 펼쳐진 기와집에서‘계동마님댁’의 풍모가 그대로 느껴진다.전체적으로 안채, 바깥채, 앞행랑채, 뒤행랑채, 사당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을 최대한 한옥 원형을보존하고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어 개보수했다.뒤행랑채였던 홍보 전시관에는 북촌의 역사와 가치를홍보하는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또 북촌 보존의중요성을 알리는 영상물도 상영하고 있다. 북촌의곳곳에 산재한 문화재와 전통 문화를 체험하는 북촌투어에 관한 다양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홍보 전시관옆에 있는 안채에는 한옥문화과 사무실, 한옥리모델링에 관련된 정보 서비스와 상담을 하는 수선상담실, 사랑방이 있어 방문객들을 편하게 맞아준다.주민들이 담소를 나누는 사랑방북촌문화센터의 사랑방은 점심 시간을 이용해주민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회의실에서는전통 문화 관련 행사를 진행하기도 하고 원래사당이었던 안채 뒤의 아담한 정자에서는 편안한휴식을 취할 수 있다. 단아한 한옥의 정취를 느끼며 차한잔 나누는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정자를 돌아안쪽으로 자리한 앞행랑채에는 전통 문화를 향유할 수있는 문화 센터가 마련되어 있다.문화 센터에서는 한문 서예, 실용 민화, 전통 다례,매듭 공예, 전통 자수, 전통 보자기, 칠보, 전통 한지공예를 포함한 전통 문화 강좌 등을 제공하고 있다.또한 영화 상영, 연주회, 전시회 등 다양한 문화 행사와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북촌의 역사와 문화재를안내하는 역할을 하면서 북촌의 정겨운 모습을오래도록 보존하고 한국 전통 주거에 대한 의미를전하는 곳. 북촌문화센터는 이웃들과 아름다운 전통을나누는 북촌의 사랑방이자 훌륭한 문화 소통 공간이다.* 민재무관댁의 뒤행랑채였던 공간은 홍보 전시관으로 쓰고 있다.* 웃자란 향나무 한 그루가 북촌문화센터의 수문장처럼 자리한다.* 북촌문화센터를 방문한 시민들이 북촌 역사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북촌문화센터는 조선 말기 세도가의 집인 민재무관댁에 들어섰다.* 북촌문화센터에서는 한문 서예, 실용 민화, 매듭 공예 등 다채로운 전통 문화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을 본떠 지은 북촌문화센터* 한옥의 처마 아래 장독들이 예스러운 운치를 더한다.* 북촌문화센터에서는 북촌 한옥마을 나들이의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공간개요 북촌문화센터는 북촌 한옥마을에 대한 자긍심을 키우고, 수준 높은 전통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위해 2002년 개관했다. 본래 조선 말기 세도가 인 ´민재무관댁´으로 ´계동마님댁´으로도 유명하다. 안채, 바깥채, 앞행랑채, 뒤행랑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한옥 원형을 보존하고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어 개보수했다. 한국의 전통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다양한 정보와 함께 전통 문화 강좌 및 전시회 등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이용시간 각 강좌별로 다름 오전 09:30 ~ 12:30 오후 14:00 ~ 17:00 야간 19:00 ~ 21:30휴무일 매주 일요일부대시설 홍보 전시관, 안방, 별당, 사무실, 사랑방 외한국어 안내 다양한 문화 강좌 프로그램 3개월 과정 사전 예약 필요외국어 안내 서울시 북촌 한옥마을 관람 프로그램 도보 관광 코스 문의 02-2171-2459 혹은 홈페이지에서 신청 가능 영어, 일본어, 중국어관리기관 서울시 한옥문화과관광팁 북촌 한옥마을 안내서 북촌문화센터에 가면 북촌의 가장 아름다운 곳을 감상할 수 있는 북촌팔경의 포인트와 북촌을 자세히 안내해주는 가이드북이 있다. 또 북촌 한옥에 대한 이해를 돕는 안내서가 마련되어 있으니 본격적인 북촌 한옥마을 투어에 나서기 전에 참고하면 좋다. 전통 문화 강좌, 전시회 등 촬영지 북촌문화센터 근처의 계동길에는 배용준, 최지우 주연의 드라마 촬영지였던 중앙고등학교와 ‘유진의 집’이 있다. 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 장소다. 북촌문화센터와 북촌 한옥마을을 돌아다니다 시간이 된다면 잠시 들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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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
- ~2.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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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 서울 최초의 근대 공원`종로’ 하면 떠오르는 탑골공원. 그러나 익숙한 만큼자세히 알지 못하는 곳. 서울 각지에서 모인 노인들의휴식 공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19년 3월 1일로기억되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귓가에 아련한‘기미년 3월 1일 정오’는 3.1 운동의 발상지로서탑골공원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원래 원각사 터였던 이곳은 1897년 대한제국 고종 때영국인 고문인 브라운의 건의에 의해 서구식 공원으로건립됐다. 파고다공원이라 오랫동안 불리다 1992년 옛지명을 따라 탑골공원으로 바뀌었다.탑골공원의 정문은 삼일문이다. 문을 지나면 곧장 민족대표 33인의 대표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과 대한독립선언을 기념한 3.1 독립선언 기념탑이 보인다. 공원가운데에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팔각정이 있고 그주변으로 유적들이 배치되어 있다.국보 제2호를 만나다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도 보인다. 조선 세조13년(1467)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는 12m이며 각층에불회도상, 인왕상, 불좌상과 화초, 동물 모양 등으로양각되었으며 원각사의 불상에서 분신한 사리와원각경을 봉인하고 있다. 형태와 평면이 특수하고화려하며 훌륭한 걸작품으로 꼽힌다. 이곳에 국보제2호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탑골공원 내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곳이며 외국인들의 발걸음이 멈추는 곳이기도하다.그 외에도 대원각사비, 조선 초기의 해시계인 앙부일구받침돌 등의 문화재와 만해 한용운 선사비, 3.1 정신찬양비가 세워져 있다. 담장 쪽으로는 3.1 운동 기념부조들이 펼쳐져 있는데 동판 부조만 봐도 당시의생생한 현장이 느껴질 만큼 섬세하게 제작되었다.공원의 외곽부에는 돌로 제작된 벤치와 꽃길이 아담한분위기를 낸다.탑골공원에서 이제 독립만세의 함성은 들리지 않는다.노인들이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거나 가끔씩 젊은연인들이 데이트를 한다. 하지만 그날의 의미는 변하지않는다. 도심과 가까우니 종로에 나섰다면 아이들과함께 찾아보고 그 숭고한 희생을 떠올리는 것도 좋을듯하다.* 흔히 볼 수 있는 기념비와는 달리 거북 받침대와 연꽃을 든 용머리 장식이 세밀하며 독특하게 조각되었다.* 보호각 안에 자리한 보물 제3호 대원각사비. 원각사의 내력이 기록된 기념비로 1471년 제작되었다.* 종로2가에 있는 탑골공원의 정문인 삼일문. 현판은 독립선언서의 글자를 따서 만들었다.* 알록달록한 단청으로 칠해진 기와 밑에 탑골공원의 유래와 공원 내부 안내도가 설명되어 있다.* 1762자로 구성된 거대한 규모의 3.1 운동 기념비는 1980년 제작되었다.* 3.1 운동 기념비 아래서 쉬고 있는 외국인 관광객들* 동판으로 제작된 3.1 운동 기념 부조물로 전국의 독립운동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국보 제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공간개요 탑골공원은 고려 시대 흥복사(興福寺)가 있던 자리로 조선 시대 원각사(圓覺寺)라 개칭하고 중건했다. 1897년 영국인 브라운이 그 터에 서울 최초의 근대 공원을 설계했다. 현재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과 여러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또한 그 못지않게 1919년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3.1 운동의 발상지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1991년 사적 제354호로 지정됐다. 파고다공원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나 1992년 옛 지명을 따라 탑골공원으로 이름을 바꿨다.이용시간 09:00 ~ 18:00이용시설 원각사지10측석탑, 팔각정, 3.1운동기념탑, 손병희선생 동상, 한용운선생기념비, 우물, 편의시설 등유적지 지정 사적 제354호지정 내역 탑골공원은 사적 제354호로 서울 최초의 근대 공원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세조 때 원각사로 중건하였던 것을 고종 34년인 1897년 재무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에 따라 현대식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1919년 3.1 운동의 발상지로 청년 학도와 애국 시민이 이곳에 모여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곳이다. 1992년 5월 28일 공원 명칭을 파고다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시설로는 독립운동 봉화에 불을 당겼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 보물 제3호인 대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 운동 기념탑, 3.1 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관리기관 탑골공원 관리사무소관광팁 3.1절 독립운동 기념식 : 매년 종로구에서는 3.1절 독립운동 기념식 및 거리 축제가 개최된다. 당시의 상황을 재연하기 위해 한복을 입고 태극기를 든 사람들과 함께 종로구를 행진해보자. 애국 선열들의 뜻을 기리고 직접 참여해보는 의미 있는 날이 될 것이다. 3.1 독립운동 기념식 및 거리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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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 ~1.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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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 이용시간
[하절기(3~10월)]
평일 09:00~20:00 / 토,일,공휴일 09:00~19:00
[동절기(11~2월)]
평일 09:00~20:00 / 토,일,공휴일 09:00~18:00
※ 기획전시의 관람시간은 전시에 따라 다를 수 있음
※ 입장은 마감시간 1시간 전까지
쉬는날 매년 1월 1일, 매주 월요일, 그외 시장이 정하는 휴관일
관람소요시간 상설전시 1시간 30분~2시간
서울 신문로변 경희궁터 98,466㎡ 가운데 경희궁 유적이 발굴되지 않은 22,809㎡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서울역사박물관이 2002년 5월 21일 개관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서울의 역사·문화를 정리하여 보여주는 도시역사박물관이다. 이로써 한반도 역사의 중심무대였던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투영하여 서울시민들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하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또한, 월드컵을 계기로 세계적인 대도시로 도약하는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널리 알리고 문화유산을 수집, 보존, 연구, 전시하는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 하여, 서울시민 개개인에게는 자긍심과 소속감을, 외국인에게는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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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
- ~3.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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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종로구 누상동
- 한양도성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둘러쌓은 도시성곽이다. 역사 속의 모든 도시들이 으레 그러했듯이 조선 제일의 도시 한양도 성곽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지방 도시들도 성곽을 두르고 있었지만 한양은 궁궐과 종묘 사직이 있는 도읍이기 때문에 한양을 둘러싼 성곽을 도성이라 불러 그 격을 높였다. 한양도성은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도시 한양을 더욱 도읍답게 만들었다.
한양은 나라를 대표하는 도시이기에 충분한 면적이 필요했고 안전하게 보호되어야 했다. 도시의 주요 시설은 한양의 분지에 두고 분지를 두른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을 쌓았다. 산위에 쌓는 산성의 장점을 이용하여 산과 산을 연결한 도성은 지형의 이점을 살려 도시를 건설한 고구려 때부터의 전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구세력과 단절하고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려 하였다. 한양은 국토의 중심에 위치하고 강과 연결되어 수운과 교통에 편리한 점,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탄하여 도읍이 될 만했다. 한양도성은 태조 5년 1월 9일 부터 2월 28일 까지, 8월13일부터 9월 30일 까지 2회에 걸쳐 전국 백성 199,260명을 불러들여 축성공사를 벌였다. 태조 때 짧은 기간 동안 쌓은 도성은 세종 때에 이르러 새롭게 단장되었다. 전국에서 백성 322,400명과 기술자 2,211명, 수령과 인솔자 115명을 불러들여 전구간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완성된 도성은 험한 곳이 16척, 그 다음이 20척, 평지는 23척의 높이였다. 전국에서 백성을 불러들인 기록은 각자성석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완성된 도성은 유교적 이념에 근거한 상징체계로 치장되었다. 도성 3대문인 숭례문(崇禮門), 흥인지문(興仁之門), 돈의문(敦義門)은 유가에서 사람의 다섯 가지 덕목[五常]으로 꼽는 인·의·예·지·신에서 글자를 따서 이름 짓고 정북문은 숙청문(肅淸門)이라 따로 지어 불렀다. 그 밖의 문들은 동북문에는 홍화문[弘化門, 교화를 넓힘], 동남문에는 광희문[光熙門, 널리 빛냄], 소북문에는 소덕문[昭德門, 덕을 빛냄], 서북문에는 창의문[彰義門, 바름을 펼침]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불렀다. 전 세계 수많은 도시들이 성곽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날 까지 성곽을 유지하고 있는 도시는 극히 드물다. 산업화에 따른 도시의 팽창과 교통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성곽의 파괴를 불러왔다. 다른 나라의 도시성곽들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도로와 철도건설로 대부분 헐려나간다. 한양도성은 일제에 의한 성곽파괴의 역사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상당부분이 잘 남아있다. 현재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구간은 12,771m이다. 한양도성 전체길이 18,627m으로 볼 때 70%가까이 남아있는 셈이다. 천만 명이 모여 살아가는 대도시 속에서 이토록 보존상태가 좋은 도시성곽을 보유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한양도성은 자연을 이용하여 도시를 건설한 뛰어난 사례로, 한국인의 전통적 지혜와 합리적 사고가 빚어낸 세계적 걸작이다. 서울은 600년의 역사를 간직한 한양도성이 있어 자연속의 도시경관과 도시속의 역사공간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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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국립공원
- ~7.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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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성북구 정릉동
- 1년 내내 새 코스를 발견하는 재미 북한산국립공원은 산성 주능선, 우이능선, 비봉능선, 형제능선, 의상능선, 진달래능선 등 수많은 능선과 계곡이 펼쳐져 있어 1년 내내 오르내려도 늘 새롭다. 아담한 오솔길부터 실개천이 흐르는 호젓한 등산로, 초보자는 쉽사리 발을 떼놓기 힘든 험한 암벽 코스까지 다양한 산행 코스가 등산객을 기다리고 있다. 산행은 주로 구기동, 효자동, 우이동, 정릉동, 세검정 등을 출발점으로 이뤄진다. 이 가운데 북한산에 처음 오는 등산객도 쉽게 오를 수 있는 코스는 북한산성 코스다. 구파발역 근처 북한산성 매표소를 통해 정상인 백운대로 가는 코스로 길이 험하지 않고 3시간이면 오르내릴 수 있다. 북한산에서 가장 넓은 계곡으로 물소리를 들으며 지친 다리를 달래고 경치를 즐기기에 좋다. 아이와 함께라면 평창동에서 시작하는 형제봉 코스를 권할 만하다. 바윗길이 있지만 가파르지 않고, 형제봉만 무사히 넘으면 이후로는 편안한 산책길이 이어진다. 가족끼리 쉬엄쉬엄 산행하기에 적당하다. 하산길을 정릉으로 잡으면 북한산의 생태와 역사를 알 수 있는 전시장, 자연 학습 관찰로를 만날 수 있다. 쉬어 가면 더 좋은 산 구기계곡을 끼고 오르는 탐방로는 매년 10만 명의 탐방객이 찾아드는 인기 탐방 코스다. 승가사나 대남문으로 갈 수 있는데, 대남문 문루에 올라가 한숨 돌리면서 조망의 유희를 즐길 수 있다. 훤칠하게 솟아오른 백색의 화강암 능선이 물결을 이룬다. 비봉 코스는 작은 오솔길 양옆으로 실개천이 흘러 혼자 오르기에 좋은 코스. 비봉으로 오르는 길에 진흥왕순수비가 오롯이 세워져 있다. 우이동 코스의 노적봉은 북한산의 가운데에 솟아 있어 웅장한 백운대와 주위를 둘러싼 주능선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돌양지꽃, 자주꿩의다리, 바위채송화 등 보기 힘든 야생화들이 피어 있어 걸음을 멈추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도 곳곳에서 보이는데, 제법 규모가 큰 절인 노적사에 들러 잠깐 목을 축일 수 있다. 이 외에도 4월 중순이면 분홍빛 물결이 넘실거리는 진달래능선, 유원지의 분위기 없이 깊은 산 속에 들어선 듯한 일선사 ~ 대성문 산길 등 잠깐 도심에서 벗어나 자연의 향취를 실컷 마실 수 있는 코스가 사계절 내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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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클럽골목
- ~4.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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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마포구 상수동
- 외국인들도 열광하는 축제의 밤홍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젊음과클럽이다. 클럽은 이제 홍대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젊은이들 사이에서 홍대로 놀러가자는 말은 곧클럽에 가자는 말로 통한다. 홍대 주변의 클럽들은색다르게 즐길 수 있는 언더그라운드 공간으로유명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웬만한외국인들 역시 홍대 클럽의 명성을 한국인들보다도 더잘 알고 있다. 홍대 클럽의 역사는 1990년대 초로 거슬러올라간다. 그 이전까지는 록카페가 대세였다. 초기마니아들이 즐겨 찾던 클럽은‘상수도’나‘발전소’였지만 지금은 문을 닫았다. 1990년대중반부터 엠아이(M.I)와 조크레드(Jokerred),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현재는 코스모로 바뀐 곳),마트마타(Matmata, 현재는 M2로 바뀐 곳) 등이 손에꼽혔다. 음악도 록, 하드코어, 모던록에서 테크노까지다양한 장르를 들을 수 있었다.클럽이 대중화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유명 클럽을찾기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클럽을찾는다. 클럽 역시 자신들의 색깔을 찾아 진화했다.인대 밴드의 라이브 클럽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인디 밴드의 음악과 거친 숨소리가 뒤섞인 공간에서사람들은 열광적으로 몸을 흔들고 땀을 흘린다. 록밴드중심으로 공연하는 사운드 홀릭이나 펑크, 하우스밴드위주의 스팟, 재즈 마니아 사이에서 유명한 클럽워터콕 등이 있다.대형 클럽과 인디 클럽, 선택은 자유다. 다양한 클럽과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홍대는 진짜 놀 줄 아는사람들로 언제나 축제 분위기다.<홍대 거리, 가상 투어 파노라마>360도 회전 입체 영상으로, 마우스나 키보드의 화살표키를 이용해 확대, 축소가 가능합니다.홍대 클럽 골목에서 꼭 둘러볼 곳1. 홍대 클럽의 대표주자 NB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이 운영하는 클럽으로유명세를 탄 곳이다. 정통 힙합 스타일의 음악을 들을수 있다. 주말에는 TV에서 방금 뛰쳐나온 듯한스타일리시한 힙합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문의02-326-1716)2. 일렉트로닉 마니아들이 사랑한 클럽 M2일렉트로닉 음악을 전문으로 한다. 음향과 조명,비주얼 3박자를 완벽하게 갖춘 클럽으로 큰 바와 대형무대로 구분되어 있다. VIP를 위한 특별 공간이 마련돼있다. (문의 02-3143-7573)3.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국악 선율, 클럽 조커레드국악 소리가 들려오는 클럽이 있다. 조커레드다. 매주셋째 주 토요일마다 타악 그룹 노름마치가 홍대 클럽조커에서 국악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젊은이들에게국악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소통할 수 있는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공연이다.(문의 02-325-4068)4. 초보자도 편하게, 클럽 사브다른 클럽과는 다르게 입구에 DJ 부스가 있다. 힙합음악과 하우스 음악을 동시에 들을 수 있는 곳이다.클럽 내부는 좌우로는 약간 좁고 전후로 긴 구조다. DJ박스가 오픈되어 있어서 원하는 음악도 맘대로 들을 수있다. (문의 02-324-6929)* 홍대 어느 라이브 클럽 입구의 전경* 줄을 서서 클럽 입장을 기다리는 젊은이들* 흥겨운 음악과 리듬을 즐기는 클러버들의 모습* 클러버들 사이에 입소문난 맛집 삼거리 포차* 금요일이면 홍대는 축제의 장으로 변한다.* 홍대 힙합 클럽 벨벳 바나나의 공연 모습* 전통 흑인 음악인 힙합을 들을 수 있는 클럽 디디(DD)* 홍대 클럽 골목에는 클럽과 바들이 함께 어우러져 자리한다.* 바깥으로 테라스를 낸 바도 많다.NB | 인디 밴드 | 클럽데이 | 홍대 클럽 골목 |공간개요 홍대 클럽은 홍대 문화의 상징이다. 1990년대 초 라이브 카페 중심으로 마이너 문화의 진수를 보여줬고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춤과 음악이 하는 클럽 문화까지 가세했다. 물론 여전히 라이브 클럽들의 활동도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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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동대문)
- ~3.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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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종로구 종로6가
- 한성부의 동쪽을 지키던 큰 대문보물 제1호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던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서울 성곽의여덟 성문 가운데 동쪽의 큰 대문에 해당한다.동대문이라는 이름도 거기서 기인했다.흥인(興仁)은 어진 마음을 북돋운다는 뜻으로유교사상의 첫 번째 덕목인 인(仁)을 뜻한다. 다른4대문과 달리 네 글자의 현판이 독특한데 도성의 동쪽방면이 텅 비어 있어 ‘의’에 해당하는 지(之)자를넣어 무게감을 주었다고 한다.흥인지문은 남쪽의 큰 대문인 숭례문과 마찬가지로조선 초기에 창건했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됐고50여 년이 지난 문종 원년(1451년)과 단종원년(1453년)에는 일부 보수 작업을 진행했다. 그 후400여 년이 지난 고종 5년(1868)에 동대문 전체가 썩어지탱하기 어려워지자 전면적으로 개수 공사를시작했다. 문루가 매우 낮아 문지를 8척 돋우고 그 위에새로 홍예(虹霓)를 쌓고 초루(譙樓)를 중건했다. 공사는1년 동안 진행돼 고종 6년(1869)에 완공됐다.그 후 일제강점기(1934년)를 거치면서 일본에 의해동대문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재 지정이 됐고 오랫동안그리 불려왔다. 그러다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일환으로 재평가 작업을 통해 본래의 이름인흥인지문을 회복했다.<흥인지문, 가상 투어 파노라마>360도 회전 입체 영상으로, 마우스나 키보드의 화살표키를 이용해 확대, 축소가 가능합니다.섬세하고 화려한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흥인지문은 중앙에 홍예문을 두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중층문루를 세워 지은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에서 볼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으로 되어 있다. 사래끝에는 토수를, 추녀 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용마루양끝에는 취두를 올려 왕성의 대문으로 손색이 없다.기둥 위의 공포는 다포양식이다. 모양새가 가늘고연약해 보이며 장식이 강조된 것이 조선 후기 양식을잘 드러낸다.흥인지문은 다른 문과 달리 옹성이 있는 것도 큰특징이다. 옹성은 곡성(曲城) 또는 치성(雉城)이라고하는데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도록 성문을 둘러쌓은작은 성을 말한다. 형세가 낮고 평탄해 적으로부터공격을 받을 수 있는 지형적 약점을 보완하고, 반대로적을 공격하기에 용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흥인지문은 조선 후기의 섬세하고 화려한 아름다움을지닌 문화재로 현재는 좌우의 성벽이 모두 헐러져 나가도로 가운데 성문만 남았다. 하지만 숭례문 화재이후에 그 소중함이 한층 더해진 우리네 문화재다.* 흥인지문의 역사를 설명하는 안내판* 처마를 4면에 두는 우진각 지붕을 이고 있다.* 보물 제1호인 흥인지문* 흥인지문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다.* 태조 7년(1398)에 완성했으나 현재의 문은 고종 6년(1869)에 다시 지었다.* 바깥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반원 모양의 옹성(饔城)을 쌓았다.공간개요 보물 제1호 흥인지문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다. 현존하는 흥인지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성문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흥인지문의 도성은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다.유적지 지정 보물 제1호지정 내역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 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도성을 쌓을 때 같이 짓기 시작하여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다. 흥인지문은 도성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문화재다.소요시간30관리기관 종로구청 문화체육과관광팁 야간 출사 흥인지문은 출사 장소로 사랑받는 곳 중 하나다. 낮보다는 주변 쇼핑타운의 현란한 네온사인과 함께 이색적인 풍경이 연출되는 야간 촬영에 더욱 좋다. 동대문 쇼핑타운 흥인지문 바로 옆에는 동대문 쇼핑타운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시장으로 의류, 액세서리, 혼수용품, 원단, 의류 부자재 등 패션의 모든 것이 모여 있는 곳이다. 국내는 물론 국제적인 쇼핑의 명소로 365일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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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 ~1.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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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 왕맥이 흐르는 터 ‘서울역사박물관 뒤편에 있는 궁궐’이라 부르는 경희궁. 조선 왕조의 이궁(離宮)이요, 조선의 5대 궁궐이라지만 여전히 무명(無名)이다. 풍모 또한 결코 그 위상과 같지 않다. 서울의 대표 도심인 신문로와 접한 터임에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경희궁의 터가 서울역사박물관을 아우를 만큼 너른 땅이었음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경희궁은 1623년 광해군이 지었다. 건립 당시만 해도 230만 제곱미터가 넘는 부지에 1500칸에 이르는 대궐이었다. 광해군 이후 철종 때까지 이궁으로 사용했으며 전각만도 100여 동이 넘었다. 광해군이 경희궁을 지은 데는 사연이 있다. 경희궁은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었다. 하지만 그 터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말이 돌자 광해군이 이를 몰수해 궁궐을 지은 것이었다. 인조반정(1623)으로 광해군은 폐위되고 뒤를 이어 인조가 왕위에 올랐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지리가 현실이 된 셈이다. 경희궁은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렀으나 영조대에 이르러 지금의 이름인 경희궁(慶熙宮)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고난과 역경의 일제강점기 경희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가장 철저하게 파괴됐다. 일사늑약(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부터다. 학교를 세우기 위해 궁궐 내의 건물을 철거했고 이를 위해 땅의 지형도 바꿨다. 또한 경희궁 터의 8만2500㎡에는 전매국 관시를 지었고 전각들도 대부분 팔아버렸다. 초창기에는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화문, 황학정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화재(1829 순조 29년)로 소실되고 나머지 전각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숭정전과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각각 옮겨졌다. 1988년 복원 작업에 착수한 후에야 몇몇 전각의 이전 작업이 추진됐다. 경희궁의 흥화문도 이때 이전 복원했다.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과 똑같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기념한 박문사(博文寺)를 장충동에 지으며 절문으로 흥화문을 옮겨 사용한 탓이다. 해방 후에는 신라호텔의 영빈관 정문으로 쓰이다 경희궁으로 돌아왔다. 경희궁 내 흥화문의 현 위치도 창건 당시의 자리는 아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에는 금천교가 있다. 금천교는 보통 궁궐의 정문 안쪽에 세우는 다리다. 이로 보아 그 앞쪽에 흥화문이 자리했을 것이다. 지금의 구세군회관에 해당해 어쩔 수 없이 현재의 자리에 들어섰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현재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이 낡고 이전의 어려움이 있어, 현재의 경희궁 숭정전은 새롭게 지어 복원했다. 국왕이 공무를 수행하던 자정전과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태령전도 새로이 복원했다. 경희궁은 2002년 일반인들에게 개방한 뒤로 21세기의 후손들과 함께 다시금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이후 조금씩 궁궐의 위용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어떤 모습으로 옛 위상을 회복할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우리의 문화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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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길
A
- ~2.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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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 외국인들도 열광하는 예술과 골동품의 아이콘서울의 대표 거리는 여전히 인사동이다. 옛날만큼은아니더라도 그 명성은 아직 바래지 않았다. 변함없이가장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거리가 인사동이요,스타벅스의 간판마저 영어가 아닌 한글로 바꿔버릴만큼 그 전통이 깊숙이 뿌리 내린 동네이기도 하다.인사동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대사동과 이문동,수전동 등을 통합해 만들었다. 종로통과 인접해일제강점기 말부터 골동품 상가가 밀집해 있었으니골동품 거리의 역사만도 족히 반세기는 훌쩍뛰어넘는다. 과거에는 종로에서 태화관길과 만나는곳을 인사동이라 했으나, 근래에는 종로2가 낙원상가입구에서 안국사거리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3.1운동 때 민족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태화관도 이제는 태화빌딩으로 바뀌었지만,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승동교회는 그 증인처럼자리한다. 1970년대는 가짜 고서화 사건과 중과세 조치등이 더해지면서 골동품상들이 대거 이동했고화랑들이 들어서기 시작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지금 인사동 거리는 골동품상을 중심으로 화랑과갤러리가 다수 자리한다. 그리고 골목 안쪽으로는 전통맛집들이 즐비하다. 인사동 갤러리도 사간동으로, 다시강남 쪽으로 대다수 이전했지만 여전히 예술과골동품의 거리로 각광받는다. 근래에는 전통 공방과갤러리 등이 모여 인사동의 신명물로 등장한 쌈지길과가나아트스페이스, 경인미술관, 목인박물관, 아름다운차박물관 등 신구의 명소들이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지형도를 그려가고 있다.<인사동길, 가상 투어 파노라마>360도 회전 입체 영상으로, 마우스나 키보드의 화살표키를 이용해 확대, 축소가 가능합니다.인사동에서 꼭 둘러볼 곳1. 쌈지길인사동의 고유한 색깔을 바탕으로 2004년 문을 연새로운 전통 문화 쇼핑 공간. [자세히 보기]2. 목인박물관국내 유일의 목조각상 전문 사립 박물관으로 재미있는민속 목조각상이 전시되어 있다. [자세히 보기]3. 갤러리룩스1999년 문을 연 인사동 최초의 사진 전문 갤러리. 다양한사진 작품을 만날 수 있다.[자세히 보기]4. 토토의 오래된 물건1970~80년대의 학용품, 장난감, 생활 용품 등 추억의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는 이색 박물관. [자세히 보기]5. 경인미술관전통 한옥 미술 전시관과 전통 다원, 아틀리에를 갖춘,도심 속 쉼터로 자리 잡은 문화 공간. [자세히 보기]* 다채로운 전통 액세서리들이 눈길을 끈다.* 고려 말 학자 우탁의 한손에 막대 잡고가 새겨진 인사동 거리 쉼터* 인사동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한국 관광의 일번지다.* 길거리의 좌판 또한 인사동 문화의 일부* 한글 간판을 내건 스타벅스는 세계에서 인사동이 유일하다.* 한지백화점 예촌은 인사동 길찾기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종로3가 쪽 인사동 사거리 전경* 인사동은 간판들의 이름만으로도 전통의 냄새가 물씬 풍겨난다.* 외국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서울의 거리 인사동* 율곡로와 만나는 인사동 끝자락 서 있는 석장승이 한국의 멋을 더한다.피맛골 | 골동품 | 외국인 | 전통 |공간개요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대사동과 이문동, 수전동 등을 통합해 만든 인사동은 종로통과 인접해 일제강점기 말부터 골동품 상가가 밀집했던 곳이다. 1970년대는 가짜 고서화 사건과 중과세 조치 등이 더해지면서 골동품상들이 더 많이 이동해 왔고 화랑들이 들어서기 시작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골목 안쪽으로는 전통 맛집들이 즐비하다. 한국의 전통적인 맛과 멋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라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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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30.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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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1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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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국립공원
- ~7.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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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성북구 정릉동
- 1년 내내 새 코스를 발견하는 재미 북한산국립공원은 산성 주능선, 우이능선, 비봉능선, 형제능선, 의상능선, 진달래능선 등 수많은 능선과 계곡이 펼쳐져 있어 1년 내내 오르내려도 늘 새롭다. 아담한 오솔길부터 실개천이 흐르는 호젓한 등산로, 초보자는 쉽사리 발을 떼놓기 힘든 험한 암벽 코스까지 다양한 산행 코스가 등산객을 기다리고 있다. 산행은 주로 구기동, 효자동, 우이동, 정릉동, 세검정 등을 출발점으로 이뤄진다. 이 가운데 북한산에 처음 오는 등산객도 쉽게 오를 수 있는 코스는 북한산성 코스다. 구파발역 근처 북한산성 매표소를 통해 정상인 백운대로 가는 코스로 길이 험하지 않고 3시간이면 오르내릴 수 있다. 북한산에서 가장 넓은 계곡으로 물소리를 들으며 지친 다리를 달래고 경치를 즐기기에 좋다. 아이와 함께라면 평창동에서 시작하는 형제봉 코스를 권할 만하다. 바윗길이 있지만 가파르지 않고, 형제봉만 무사히 넘으면 이후로는 편안한 산책길이 이어진다. 가족끼리 쉬엄쉬엄 산행하기에 적당하다. 하산길을 정릉으로 잡으면 북한산의 생태와 역사를 알 수 있는 전시장, 자연 학습 관찰로를 만날 수 있다. 쉬어 가면 더 좋은 산 구기계곡을 끼고 오르는 탐방로는 매년 10만 명의 탐방객이 찾아드는 인기 탐방 코스다. 승가사나 대남문으로 갈 수 있는데, 대남문 문루에 올라가 한숨 돌리면서 조망의 유희를 즐길 수 있다. 훤칠하게 솟아오른 백색의 화강암 능선이 물결을 이룬다. 비봉 코스는 작은 오솔길 양옆으로 실개천이 흘러 혼자 오르기에 좋은 코스. 비봉으로 오르는 길에 진흥왕순수비가 오롯이 세워져 있다. 우이동 코스의 노적봉은 북한산의 가운데에 솟아 있어 웅장한 백운대와 주위를 둘러싼 주능선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돌양지꽃, 자주꿩의다리, 바위채송화 등 보기 힘든 야생화들이 피어 있어 걸음을 멈추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도 곳곳에서 보이는데, 제법 규모가 큰 절인 노적사에 들러 잠깐 목을 축일 수 있다. 이 외에도 4월 중순이면 분홍빛 물결이 넘실거리는 진달래능선, 유원지의 분위기 없이 깊은 산 속에 들어선 듯한 일선사 ~ 대성문 산길 등 잠깐 도심에서 벗어나 자연의 향취를 실컷 마실 수 있는 코스가 사계절 내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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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문화센터
- ~2.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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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종로구 계동
- 전통적인 북촌 한옥마을을 한눈에 보다북촌 한옥마을을 둘러보기 전에 먼저 다양한 정보를얻을 수 있는 북촌문화센터를 찾아가보자.북촌문화센터는 본래 조선 말기 세도가의 집인민재무관댁 한옥에 들어섰다. 민재무관댁은 창덕궁후원의 연경당을 본떠 지었다. 민재무관댁 며느리였던이규숙 씨가 반가 음식에 대해 구술한 책 ‘이계동마님이 먹은 여든 살’로 인해 계동마님댁으로도잘 알려져 있다. 이곳을 서울시가 매입해 북촌주민들이 한옥마을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홍보 전시관과 함께 다양한 전통 문화 강좌 및 전시를기획하는 문화 사랑방으로 가꿔왔다.풍수지리적으로 서울에서 으뜸인 경복궁과 창덕궁사이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고풍스러운 마을인 북촌.양반들이 터를 일궈 전통 기와집들이 늘어선 북촌한옥마을의 역사부터 현재의 모습까지 한번에 볼 수있는 곳이 북촌문화센터다. 안으로 들어서면아담하지만 겹겹이 펼쳐진 기와집에서‘계동마님댁’의 풍모가 그대로 느껴진다.전체적으로 안채, 바깥채, 앞행랑채, 뒤행랑채, 사당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을 최대한 한옥 원형을보존하고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어 개보수했다.뒤행랑채였던 홍보 전시관에는 북촌의 역사와 가치를홍보하는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또 북촌 보존의중요성을 알리는 영상물도 상영하고 있다. 북촌의곳곳에 산재한 문화재와 전통 문화를 체험하는 북촌투어에 관한 다양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홍보 전시관옆에 있는 안채에는 한옥문화과 사무실, 한옥리모델링에 관련된 정보 서비스와 상담을 하는 수선상담실, 사랑방이 있어 방문객들을 편하게 맞아준다.주민들이 담소를 나누는 사랑방북촌문화센터의 사랑방은 점심 시간을 이용해주민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회의실에서는전통 문화 관련 행사를 진행하기도 하고 원래사당이었던 안채 뒤의 아담한 정자에서는 편안한휴식을 취할 수 있다. 단아한 한옥의 정취를 느끼며 차한잔 나누는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정자를 돌아안쪽으로 자리한 앞행랑채에는 전통 문화를 향유할 수있는 문화 센터가 마련되어 있다.문화 센터에서는 한문 서예, 실용 민화, 전통 다례,매듭 공예, 전통 자수, 전통 보자기, 칠보, 전통 한지공예를 포함한 전통 문화 강좌 등을 제공하고 있다.또한 영화 상영, 연주회, 전시회 등 다양한 문화 행사와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북촌의 역사와 문화재를안내하는 역할을 하면서 북촌의 정겨운 모습을오래도록 보존하고 한국 전통 주거에 대한 의미를전하는 곳. 북촌문화센터는 이웃들과 아름다운 전통을나누는 북촌의 사랑방이자 훌륭한 문화 소통 공간이다.* 민재무관댁의 뒤행랑채였던 공간은 홍보 전시관으로 쓰고 있다.* 웃자란 향나무 한 그루가 북촌문화센터의 수문장처럼 자리한다.* 북촌문화센터를 방문한 시민들이 북촌 역사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북촌문화센터는 조선 말기 세도가의 집인 민재무관댁에 들어섰다.* 북촌문화센터에서는 한문 서예, 실용 민화, 매듭 공예 등 다채로운 전통 문화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을 본떠 지은 북촌문화센터* 한옥의 처마 아래 장독들이 예스러운 운치를 더한다.* 북촌문화센터에서는 북촌 한옥마을 나들이의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공간개요 북촌문화센터는 북촌 한옥마을에 대한 자긍심을 키우고, 수준 높은 전통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위해 2002년 개관했다. 본래 조선 말기 세도가 인 ´민재무관댁´으로 ´계동마님댁´으로도 유명하다. 안채, 바깥채, 앞행랑채, 뒤행랑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한옥 원형을 보존하고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어 개보수했다. 한국의 전통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다양한 정보와 함께 전통 문화 강좌 및 전시회 등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이용시간 각 강좌별로 다름 오전 09:30 ~ 12:30 오후 14:00 ~ 17:00 야간 19:00 ~ 21:30휴무일 매주 일요일부대시설 홍보 전시관, 안방, 별당, 사무실, 사랑방 외한국어 안내 다양한 문화 강좌 프로그램 3개월 과정 사전 예약 필요외국어 안내 서울시 북촌 한옥마을 관람 프로그램 도보 관광 코스 문의 02-2171-2459 혹은 홈페이지에서 신청 가능 영어, 일본어, 중국어관리기관 서울시 한옥문화과관광팁 북촌 한옥마을 안내서 북촌문화센터에 가면 북촌의 가장 아름다운 곳을 감상할 수 있는 북촌팔경의 포인트와 북촌을 자세히 안내해주는 가이드북이 있다. 또 북촌 한옥에 대한 이해를 돕는 안내서가 마련되어 있으니 본격적인 북촌 한옥마을 투어에 나서기 전에 참고하면 좋다. 전통 문화 강좌, 전시회 등 촬영지 북촌문화센터 근처의 계동길에는 배용준, 최지우 주연의 드라마 촬영지였던 중앙고등학교와 ‘유진의 집’이 있다. 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 장소다. 북촌문화센터와 북촌 한옥마을을 돌아다니다 시간이 된다면 잠시 들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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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동대문)
- ~3.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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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종로구 종로6가
- 한성부의 동쪽을 지키던 큰 대문보물 제1호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던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서울 성곽의여덟 성문 가운데 동쪽의 큰 대문에 해당한다.동대문이라는 이름도 거기서 기인했다.흥인(興仁)은 어진 마음을 북돋운다는 뜻으로유교사상의 첫 번째 덕목인 인(仁)을 뜻한다. 다른4대문과 달리 네 글자의 현판이 독특한데 도성의 동쪽방면이 텅 비어 있어 ‘의’에 해당하는 지(之)자를넣어 무게감을 주었다고 한다.흥인지문은 남쪽의 큰 대문인 숭례문과 마찬가지로조선 초기에 창건했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됐고50여 년이 지난 문종 원년(1451년)과 단종원년(1453년)에는 일부 보수 작업을 진행했다. 그 후400여 년이 지난 고종 5년(1868)에 동대문 전체가 썩어지탱하기 어려워지자 전면적으로 개수 공사를시작했다. 문루가 매우 낮아 문지를 8척 돋우고 그 위에새로 홍예(虹霓)를 쌓고 초루(譙樓)를 중건했다. 공사는1년 동안 진행돼 고종 6년(1869)에 완공됐다.그 후 일제강점기(1934년)를 거치면서 일본에 의해동대문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재 지정이 됐고 오랫동안그리 불려왔다. 그러다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일환으로 재평가 작업을 통해 본래의 이름인흥인지문을 회복했다.<흥인지문, 가상 투어 파노라마>360도 회전 입체 영상으로, 마우스나 키보드의 화살표키를 이용해 확대, 축소가 가능합니다.섬세하고 화려한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흥인지문은 중앙에 홍예문을 두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중층문루를 세워 지은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에서 볼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으로 되어 있다. 사래끝에는 토수를, 추녀 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용마루양끝에는 취두를 올려 왕성의 대문으로 손색이 없다.기둥 위의 공포는 다포양식이다. 모양새가 가늘고연약해 보이며 장식이 강조된 것이 조선 후기 양식을잘 드러낸다.흥인지문은 다른 문과 달리 옹성이 있는 것도 큰특징이다. 옹성은 곡성(曲城) 또는 치성(雉城)이라고하는데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도록 성문을 둘러쌓은작은 성을 말한다. 형세가 낮고 평탄해 적으로부터공격을 받을 수 있는 지형적 약점을 보완하고, 반대로적을 공격하기에 용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흥인지문은 조선 후기의 섬세하고 화려한 아름다움을지닌 문화재로 현재는 좌우의 성벽이 모두 헐러져 나가도로 가운데 성문만 남았다. 하지만 숭례문 화재이후에 그 소중함이 한층 더해진 우리네 문화재다.* 흥인지문의 역사를 설명하는 안내판* 처마를 4면에 두는 우진각 지붕을 이고 있다.* 보물 제1호인 흥인지문* 흥인지문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다.* 태조 7년(1398)에 완성했으나 현재의 문은 고종 6년(1869)에 다시 지었다.* 바깥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반원 모양의 옹성(饔城)을 쌓았다.공간개요 보물 제1호 흥인지문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다. 현존하는 흥인지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성문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흥인지문의 도성은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다.유적지 지정 보물 제1호지정 내역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 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도성을 쌓을 때 같이 짓기 시작하여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다. 흥인지문은 도성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문화재다.소요시간30관리기관 종로구청 문화체육과관광팁 야간 출사 흥인지문은 출사 장소로 사랑받는 곳 중 하나다. 낮보다는 주변 쇼핑타운의 현란한 네온사인과 함께 이색적인 풍경이 연출되는 야간 촬영에 더욱 좋다. 동대문 쇼핑타운 흥인지문 바로 옆에는 동대문 쇼핑타운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시장으로 의류, 액세서리, 혼수용품, 원단, 의류 부자재 등 패션의 모든 것이 모여 있는 곳이다. 국내는 물론 국제적인 쇼핑의 명소로 365일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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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클럽골목
- ~4.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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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마포구 상수동
- 외국인들도 열광하는 축제의 밤홍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젊음과클럽이다. 클럽은 이제 홍대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젊은이들 사이에서 홍대로 놀러가자는 말은 곧클럽에 가자는 말로 통한다. 홍대 주변의 클럽들은색다르게 즐길 수 있는 언더그라운드 공간으로유명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웬만한외국인들 역시 홍대 클럽의 명성을 한국인들보다도 더잘 알고 있다. 홍대 클럽의 역사는 1990년대 초로 거슬러올라간다. 그 이전까지는 록카페가 대세였다. 초기마니아들이 즐겨 찾던 클럽은‘상수도’나‘발전소’였지만 지금은 문을 닫았다. 1990년대중반부터 엠아이(M.I)와 조크레드(Jokerred),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현재는 코스모로 바뀐 곳),마트마타(Matmata, 현재는 M2로 바뀐 곳) 등이 손에꼽혔다. 음악도 록, 하드코어, 모던록에서 테크노까지다양한 장르를 들을 수 있었다.클럽이 대중화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유명 클럽을찾기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클럽을찾는다. 클럽 역시 자신들의 색깔을 찾아 진화했다.인대 밴드의 라이브 클럽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인디 밴드의 음악과 거친 숨소리가 뒤섞인 공간에서사람들은 열광적으로 몸을 흔들고 땀을 흘린다. 록밴드중심으로 공연하는 사운드 홀릭이나 펑크, 하우스밴드위주의 스팟, 재즈 마니아 사이에서 유명한 클럽워터콕 등이 있다.대형 클럽과 인디 클럽, 선택은 자유다. 다양한 클럽과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홍대는 진짜 놀 줄 아는사람들로 언제나 축제 분위기다.<홍대 거리, 가상 투어 파노라마>360도 회전 입체 영상으로, 마우스나 키보드의 화살표키를 이용해 확대, 축소가 가능합니다.홍대 클럽 골목에서 꼭 둘러볼 곳1. 홍대 클럽의 대표주자 NB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이 운영하는 클럽으로유명세를 탄 곳이다. 정통 힙합 스타일의 음악을 들을수 있다. 주말에는 TV에서 방금 뛰쳐나온 듯한스타일리시한 힙합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문의02-326-1716)2. 일렉트로닉 마니아들이 사랑한 클럽 M2일렉트로닉 음악을 전문으로 한다. 음향과 조명,비주얼 3박자를 완벽하게 갖춘 클럽으로 큰 바와 대형무대로 구분되어 있다. VIP를 위한 특별 공간이 마련돼있다. (문의 02-3143-7573)3.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국악 선율, 클럽 조커레드국악 소리가 들려오는 클럽이 있다. 조커레드다. 매주셋째 주 토요일마다 타악 그룹 노름마치가 홍대 클럽조커에서 국악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젊은이들에게국악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소통할 수 있는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공연이다.(문의 02-325-4068)4. 초보자도 편하게, 클럽 사브다른 클럽과는 다르게 입구에 DJ 부스가 있다. 힙합음악과 하우스 음악을 동시에 들을 수 있는 곳이다.클럽 내부는 좌우로는 약간 좁고 전후로 긴 구조다. DJ박스가 오픈되어 있어서 원하는 음악도 맘대로 들을 수있다. (문의 02-324-6929)* 홍대 어느 라이브 클럽 입구의 전경* 줄을 서서 클럽 입장을 기다리는 젊은이들* 흥겨운 음악과 리듬을 즐기는 클러버들의 모습* 클러버들 사이에 입소문난 맛집 삼거리 포차* 금요일이면 홍대는 축제의 장으로 변한다.* 홍대 힙합 클럽 벨벳 바나나의 공연 모습* 전통 흑인 음악인 힙합을 들을 수 있는 클럽 디디(DD)* 홍대 클럽 골목에는 클럽과 바들이 함께 어우러져 자리한다.* 바깥으로 테라스를 낸 바도 많다.NB | 인디 밴드 | 클럽데이 | 홍대 클럽 골목 |공간개요 홍대 클럽은 홍대 문화의 상징이다. 1990년대 초 라이브 카페 중심으로 마이너 문화의 진수를 보여줬고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춤과 음악이 하는 클럽 문화까지 가세했다. 물론 여전히 라이브 클럽들의 활동도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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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 ~1.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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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 이용시간
[하절기(3~10월)]
평일 09:00~20:00 / 토,일,공휴일 09:00~19:00
[동절기(11~2월)]
평일 09:00~20:00 / 토,일,공휴일 09:00~18:00
※ 기획전시의 관람시간은 전시에 따라 다를 수 있음
※ 입장은 마감시간 1시간 전까지
쉬는날 매년 1월 1일, 매주 월요일, 그외 시장이 정하는 휴관일
관람소요시간 상설전시 1시간 30분~2시간
서울 신문로변 경희궁터 98,466㎡ 가운데 경희궁 유적이 발굴되지 않은 22,809㎡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서울역사박물관이 2002년 5월 21일 개관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서울의 역사·문화를 정리하여 보여주는 도시역사박물관이다. 이로써 한반도 역사의 중심무대였던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투영하여 서울시민들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하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또한, 월드컵을 계기로 세계적인 대도시로 도약하는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널리 알리고 문화유산을 수집, 보존, 연구, 전시하는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 하여, 서울시민 개개인에게는 자긍심과 소속감을, 외국인에게는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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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
- ~3.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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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종로구 누상동
- 한양도성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둘러쌓은 도시성곽이다. 역사 속의 모든 도시들이 으레 그러했듯이 조선 제일의 도시 한양도 성곽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지방 도시들도 성곽을 두르고 있었지만 한양은 궁궐과 종묘 사직이 있는 도읍이기 때문에 한양을 둘러싼 성곽을 도성이라 불러 그 격을 높였다. 한양도성은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도시 한양을 더욱 도읍답게 만들었다.
한양은 나라를 대표하는 도시이기에 충분한 면적이 필요했고 안전하게 보호되어야 했다. 도시의 주요 시설은 한양의 분지에 두고 분지를 두른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을 쌓았다. 산위에 쌓는 산성의 장점을 이용하여 산과 산을 연결한 도성은 지형의 이점을 살려 도시를 건설한 고구려 때부터의 전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구세력과 단절하고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려 하였다. 한양은 국토의 중심에 위치하고 강과 연결되어 수운과 교통에 편리한 점,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탄하여 도읍이 될 만했다. 한양도성은 태조 5년 1월 9일 부터 2월 28일 까지, 8월13일부터 9월 30일 까지 2회에 걸쳐 전국 백성 199,260명을 불러들여 축성공사를 벌였다. 태조 때 짧은 기간 동안 쌓은 도성은 세종 때에 이르러 새롭게 단장되었다. 전국에서 백성 322,400명과 기술자 2,211명, 수령과 인솔자 115명을 불러들여 전구간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완성된 도성은 험한 곳이 16척, 그 다음이 20척, 평지는 23척의 높이였다. 전국에서 백성을 불러들인 기록은 각자성석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완성된 도성은 유교적 이념에 근거한 상징체계로 치장되었다. 도성 3대문인 숭례문(崇禮門), 흥인지문(興仁之門), 돈의문(敦義門)은 유가에서 사람의 다섯 가지 덕목[五常]으로 꼽는 인·의·예·지·신에서 글자를 따서 이름 짓고 정북문은 숙청문(肅淸門)이라 따로 지어 불렀다. 그 밖의 문들은 동북문에는 홍화문[弘化門, 교화를 넓힘], 동남문에는 광희문[光熙門, 널리 빛냄], 소북문에는 소덕문[昭德門, 덕을 빛냄], 서북문에는 창의문[彰義門, 바름을 펼침]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불렀다. 전 세계 수많은 도시들이 성곽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날 까지 성곽을 유지하고 있는 도시는 극히 드물다. 산업화에 따른 도시의 팽창과 교통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성곽의 파괴를 불러왔다. 다른 나라의 도시성곽들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도로와 철도건설로 대부분 헐려나간다. 한양도성은 일제에 의한 성곽파괴의 역사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상당부분이 잘 남아있다. 현재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구간은 12,771m이다. 한양도성 전체길이 18,627m으로 볼 때 70%가까이 남아있는 셈이다. 천만 명이 모여 살아가는 대도시 속에서 이토록 보존상태가 좋은 도시성곽을 보유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한양도성은 자연을 이용하여 도시를 건설한 뛰어난 사례로, 한국인의 전통적 지혜와 합리적 사고가 빚어낸 세계적 걸작이다. 서울은 600년의 역사를 간직한 한양도성이 있어 자연속의 도시경관과 도시속의 역사공간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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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
- ~2.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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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 서울 최초의 근대 공원`종로’ 하면 떠오르는 탑골공원. 그러나 익숙한 만큼자세히 알지 못하는 곳. 서울 각지에서 모인 노인들의휴식 공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19년 3월 1일로기억되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귓가에 아련한‘기미년 3월 1일 정오’는 3.1 운동의 발상지로서탑골공원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원래 원각사 터였던 이곳은 1897년 대한제국 고종 때영국인 고문인 브라운의 건의에 의해 서구식 공원으로건립됐다. 파고다공원이라 오랫동안 불리다 1992년 옛지명을 따라 탑골공원으로 바뀌었다.탑골공원의 정문은 삼일문이다. 문을 지나면 곧장 민족대표 33인의 대표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과 대한독립선언을 기념한 3.1 독립선언 기념탑이 보인다. 공원가운데에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팔각정이 있고 그주변으로 유적들이 배치되어 있다.국보 제2호를 만나다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도 보인다. 조선 세조13년(1467)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는 12m이며 각층에불회도상, 인왕상, 불좌상과 화초, 동물 모양 등으로양각되었으며 원각사의 불상에서 분신한 사리와원각경을 봉인하고 있다. 형태와 평면이 특수하고화려하며 훌륭한 걸작품으로 꼽힌다. 이곳에 국보제2호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탑골공원 내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곳이며 외국인들의 발걸음이 멈추는 곳이기도하다.그 외에도 대원각사비, 조선 초기의 해시계인 앙부일구받침돌 등의 문화재와 만해 한용운 선사비, 3.1 정신찬양비가 세워져 있다. 담장 쪽으로는 3.1 운동 기념부조들이 펼쳐져 있는데 동판 부조만 봐도 당시의생생한 현장이 느껴질 만큼 섬세하게 제작되었다.공원의 외곽부에는 돌로 제작된 벤치와 꽃길이 아담한분위기를 낸다.탑골공원에서 이제 독립만세의 함성은 들리지 않는다.노인들이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거나 가끔씩 젊은연인들이 데이트를 한다. 하지만 그날의 의미는 변하지않는다. 도심과 가까우니 종로에 나섰다면 아이들과함께 찾아보고 그 숭고한 희생을 떠올리는 것도 좋을듯하다.* 흔히 볼 수 있는 기념비와는 달리 거북 받침대와 연꽃을 든 용머리 장식이 세밀하며 독특하게 조각되었다.* 보호각 안에 자리한 보물 제3호 대원각사비. 원각사의 내력이 기록된 기념비로 1471년 제작되었다.* 종로2가에 있는 탑골공원의 정문인 삼일문. 현판은 독립선언서의 글자를 따서 만들었다.* 알록달록한 단청으로 칠해진 기와 밑에 탑골공원의 유래와 공원 내부 안내도가 설명되어 있다.* 1762자로 구성된 거대한 규모의 3.1 운동 기념비는 1980년 제작되었다.* 3.1 운동 기념비 아래서 쉬고 있는 외국인 관광객들* 동판으로 제작된 3.1 운동 기념 부조물로 전국의 독립운동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국보 제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공간개요 탑골공원은 고려 시대 흥복사(興福寺)가 있던 자리로 조선 시대 원각사(圓覺寺)라 개칭하고 중건했다. 1897년 영국인 브라운이 그 터에 서울 최초의 근대 공원을 설계했다. 현재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과 여러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또한 그 못지않게 1919년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3.1 운동의 발상지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1991년 사적 제354호로 지정됐다. 파고다공원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나 1992년 옛 지명을 따라 탑골공원으로 이름을 바꿨다.이용시간 09:00 ~ 18:00이용시설 원각사지10측석탑, 팔각정, 3.1운동기념탑, 손병희선생 동상, 한용운선생기념비, 우물, 편의시설 등유적지 지정 사적 제354호지정 내역 탑골공원은 사적 제354호로 서울 최초의 근대 공원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세조 때 원각사로 중건하였던 것을 고종 34년인 1897년 재무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에 따라 현대식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1919년 3.1 운동의 발상지로 청년 학도와 애국 시민이 이곳에 모여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곳이다. 1992년 5월 28일 공원 명칭을 파고다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시설로는 독립운동 봉화에 불을 당겼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 보물 제3호인 대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 운동 기념탑, 3.1 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관리기관 탑골공원 관리사무소관광팁 3.1절 독립운동 기념식 : 매년 종로구에서는 3.1절 독립운동 기념식 및 거리 축제가 개최된다. 당시의 상황을 재연하기 위해 한복을 입고 태극기를 든 사람들과 함께 종로구를 행진해보자. 애국 선열들의 뜻을 기리고 직접 참여해보는 의미 있는 날이 될 것이다. 3.1 독립운동 기념식 및 거리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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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 ~1.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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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 왕맥이 흐르는 터 ‘서울역사박물관 뒤편에 있는 궁궐’이라 부르는 경희궁. 조선 왕조의 이궁(離宮)이요, 조선의 5대 궁궐이라지만 여전히 무명(無名)이다. 풍모 또한 결코 그 위상과 같지 않다. 서울의 대표 도심인 신문로와 접한 터임에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경희궁의 터가 서울역사박물관을 아우를 만큼 너른 땅이었음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경희궁은 1623년 광해군이 지었다. 건립 당시만 해도 230만 제곱미터가 넘는 부지에 1500칸에 이르는 대궐이었다. 광해군 이후 철종 때까지 이궁으로 사용했으며 전각만도 100여 동이 넘었다. 광해군이 경희궁을 지은 데는 사연이 있다. 경희궁은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었다. 하지만 그 터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말이 돌자 광해군이 이를 몰수해 궁궐을 지은 것이었다. 인조반정(1623)으로 광해군은 폐위되고 뒤를 이어 인조가 왕위에 올랐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지리가 현실이 된 셈이다. 경희궁은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렀으나 영조대에 이르러 지금의 이름인 경희궁(慶熙宮)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고난과 역경의 일제강점기 경희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가장 철저하게 파괴됐다. 일사늑약(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부터다. 학교를 세우기 위해 궁궐 내의 건물을 철거했고 이를 위해 땅의 지형도 바꿨다. 또한 경희궁 터의 8만2500㎡에는 전매국 관시를 지었고 전각들도 대부분 팔아버렸다. 초창기에는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화문, 황학정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화재(1829 순조 29년)로 소실되고 나머지 전각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숭정전과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각각 옮겨졌다. 1988년 복원 작업에 착수한 후에야 몇몇 전각의 이전 작업이 추진됐다. 경희궁의 흥화문도 이때 이전 복원했다.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과 똑같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기념한 박문사(博文寺)를 장충동에 지으며 절문으로 흥화문을 옮겨 사용한 탓이다. 해방 후에는 신라호텔의 영빈관 정문으로 쓰이다 경희궁으로 돌아왔다. 경희궁 내 흥화문의 현 위치도 창건 당시의 자리는 아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에는 금천교가 있다. 금천교는 보통 궁궐의 정문 안쪽에 세우는 다리다. 이로 보아 그 앞쪽에 흥화문이 자리했을 것이다. 지금의 구세군회관에 해당해 어쩔 수 없이 현재의 자리에 들어섰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현재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이 낡고 이전의 어려움이 있어, 현재의 경희궁 숭정전은 새롭게 지어 복원했다. 국왕이 공무를 수행하던 자정전과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태령전도 새로이 복원했다. 경희궁은 2002년 일반인들에게 개방한 뒤로 21세기의 후손들과 함께 다시금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이후 조금씩 궁궐의 위용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어떤 모습으로 옛 위상을 회복할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우리의 문화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