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 40분 쯤 연운구가 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야심차게 관광개발을 하는 곳으로 안내했다. 지난해 11월에 왔을 때는 전형적인 마을이 있었던 곳이었는데, 이번 답사에 와서 보니 거주하던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도로도 넓히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듯이 주변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도심재생사업을 벌였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점심을 먹기 위해 들렸던 식당은 1962년에 지어졌던 공회당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식당 내부는 1966년에 발생한 문화대혁명의 시대로 되돌아간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인테리어를 꾸몄다. 3층 높이의 공회당을 개조한 탓에 식당의 천장은 훤히 뚫려 있고 벽면에는 모택동의 문혁 시절 온갖 정치적 구호와 선동 문구로 가득 차 있었다.
高 站 서기는 점심이 끝날 무렵 다시 답사단을 찾았다. 그는 식당에서 왼쪽 문을 열고 답사단원들에게 고급펜션시설을 보여줬다. 고급 펜션시설은 區에서 직접 관리 및 운영하고 있었다. 이어 답사단은 당왕호(唐王湖)와 인접한 곳에 세워진 ‘숙성신라인주거유지 기념비’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김 단장은 이 기념비를 세울 자리가 마땅히 없어서 쩔쩔맸는데, 이곳에 살던 농민이 자신의 마당에 세우도록 흔쾌히 허락해주었던 사실을 회고했다. 특히 농민이 김 단장에게 전했던 말을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당신들만 신라인의 후예가 아니라 나도 신라인의 후예다”며 “천년 동안 헤어졌다가 오늘에야 만났으니까 우리들은 형제다”라는 말을 전했을 때 주위에 있던 일행들은 한동안 숙연해졌다. 김 단장은 그 농민이 살아있다면 만나고 싶다는 뜻을 高 站 주임에게 말했다. 그는 행정력을 동원해서 파악한 결과, 그 농민은 현재 요양원에 거주하고 있으며 보행이 어려워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전해줬다. 이처럼 강소성 연운항시 연운구 숙성(宿城)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원래 이곳은 성(城)이 아니었는데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당태종이 연운항 지역에서 전투를 하던 중 숙성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대규모 인력을 동원하여 성을 쌓았던 탓에 ‘숙성’이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특히 당왕호 밑에 있는 보가산(保駕山)의 명칭은 당태종이 연개소문과 싸움을 벌였으나 패했을 때 설인귀가 왕을 보호했다는 뜻에서 유래됐다는 이야기가 운대산지(云臺山誌)에 전해지고 있다. 또한 연개소문의 군사가 주둔했던 소문정(蘇文頂)도 있다. 이는 숙성촌에 고구려 유민들의 후예들이 이주 정착하는 과정에서 구전으로 전했던 설화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들었다.
일행은 세외도원(世外桃源)인 당왕호 주변에 조성중인 장보고기념관 및 한중문화교류원 등을 둘러봤다. 이곳이 인간세상의 선경(仙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는 것이다. 장보고기념관은 ㄷ 자 모향의 건물이 완공됐으나 전시품 등 인테리어가 진행되지 않은 탓에 썰렁했다. 이어 답사단은 버스 2대에 분승하여 해상운대산(海上云台山)의 정상까지 둘러볼 수 있었다. 해발 605.4m의 운대산은 사계절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데, 봄에는 꽃과 여름에는 바다를, 가을에는 단풍을, 겨울에는 눈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에 유명한 관광지로 알려졌다.
5시쯤 高 站 주임의 안내로 연운구 청사를 방문했다. 연운구와 완도군은 오래전에 우호협력도시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답사단을 초청한 것이다. 연운구를 대표하여 이군생(李君生) 주석과 혜철(嵇軼) 부구청장과 정학도(程學桃) 문화체육여유국장, 高 站 주임과 답사단이 마주 앉았다. 李 주석은 연운구 부구청장을 역임하고 주석으로 영전했는데, 54세에 불과했다. 또한 혜철 부구청장도 50대 초반일 정도로 젊은 것이 특징이었다. 참석자 소개에 이어 李 주석 환영사와 김성훈 단장의 답사, 그리고 연운구 동영상 시청, 건의 등 기타 안건으로 순으로 진행됐다. 이어 연운구청이 청사 내 마련한 만찬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중국의 의전은 자리배석에도 전략적 마인드를 갖고 배치했다. 예를 들면 원형테이블에 주최측의 책임자와 부책임자가 서로 마주 앉고 李 주석 옆에는 김 이사장과 고충석 총장 등 원로를 좌 우 양쪽에 앉게 했다. 또 정학도 국장과 완도 정명성 문화체육과장이 옆에 앉도록 배려했다. 연운구 측에서는 특산주를 권하면서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완화시키려고 애를 썼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 중국 측은 한국에서 연운항시 연운구 숙성촌 등의 관광을 많이 올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4일째를 맞는 답사단원은 재당신라인의 집단 거주지였던 연수향을 찾아가기로 했다. 이곳도 정확한 지점의 위치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도착지점을 연수대교(漣水大橋)로 잡았다. 그러나 가이드에 따르면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에서 ‘연수대교’를 검색하면 연수현에 건설된 교량들의 리스트가 전부 뜬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곳은 과거에 漣水大橋였지만, 근례에 확장되면서 남문대교(南門大橋)로 명칭이 바꿨다. 김성훈 단장은 남문대교의 ‘교량공시패(橋梁公示牌)’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눈은 쌍전벽해(桑田碧海)로 변한 주위를 보면서 깊은 상념에 잠겼다. 당나라 때 이곳의 명칭은 연수향(漣水鄕)이었다. 장보고와 같이 당나라에 건너갔던 정년(鄭年)이 군 제대 후 거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신라소가 설치될 정도로 재당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했었다. 연수현에서 1시간 떨어진 회안시(옛 지명 楚州)도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했었다. 초주는 유방을 도와 항우를 물리쳤던 한나라의 충신 한신과 서유기를 쓴 소설가 오승은․주은래의 고향으로 유명하지만, 무엇보다도 대운하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486년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 인공하도 한구(邗구)를 건설했으며 고회하(故淮河)와 경항대운하가 교차하는 지점에 초주가 위치해 있다. 특히 회하(淮河)와 사수(四水)로 진입하는 고말구(古末口) 주변에 신라인들이 집단거주하고 있었다. 이런 지리적 특성 때문에 중국 역대 왕조는 초주에 운하를 관리하는 ‘조운총독부’를 뒀다. 하지만 이번 답사에 봤던 회안의 운하(運河)는 오간데 없고 복개(覆蓋)되어 고층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특히 고말구 주변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층아파트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신라방유지’가 새겨진 기념석은 고말구역 주변 소공원으로 옮겨져 있었다.
2시 쯤 양주(揚州)시 수서호(瘦西湖) 북문 입구의 최치원기념관을 방문했다. 양주시는 2007년 중국 외교부의 비준을 받아 당성(唐城)유적지 안에 최치원기념관(崔致遠紀念館)을 건립했다. 최치원기념관이 이곳에 들어선 것은 회남절도사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약 5년간 근무했던 인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에는 장보고기념관과 최치원기념관, 안중근기념관 등 한국인물의 기념관이 있다. 답사단의 일정과는 별도로 필자와 김성훈 단장, 김덕수 교수는 당성 유적지 주차장에서 4시 35분에 주강(朱江) 전 양주대학교 교수의 수제자인 양명원(梁明元) 양주시(揚州市) 강도구(江都區) 문화관광국장을 만났다. 양 국장은 한국 어학연수를 다녀온 딸과 함께 우리 일행을 맞아주었다. 필자는 작년에 선발대로 왔을 때 김덕수 절강해양대학교 교수가 양주까지 찾아와 양명원 국장의 안내로 朱江 전 교수의 자택을 방문했었다. 허름한 아파트의 5층에 살고 있는 朱 교수와 김 이사장은 25년 만에 해후(邂逅)한 탓인 지 악수한 손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다. 이처럼 생면부지였던 이들이 인연을 맺게 해준 것은 장보고 대사였다. 김 단장이 1992년 11월 완도군에서 개최된 국제학술회의에 발표자로 朱 교수를 섭외했기 때문이다. 朱 교수는 양주박물관에 보관한 청자는 고려청자가 아닌 강진에서 만들어진 신라청자라고 주장했다. 이는 고려시대 때 한국의 청자가 발생했다는 기존의 학설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번 만남에도 김 단장은 한국에서 고려청자의 발생 시기를 놓고 학자들끼리 논란이 일고 있다고 지적하자, 朱 교수는 또렷하게 통일신라시대라고 못을 박았다. 아흔 살의 朱 교수는 다리가 아픈 탓에 외부활동을 전혀 하지 못한 채 집에서만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컴퓨터로 논문 및 관심분야의 글을 써서 책으로 출판하는 등 외부와의 대화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었다. 방문하던 날도 朱 교수는 컴퓨터 화면에 1992년 완도에서 열렸던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모습과 명승 제3호 구계등(九階燈)에서 김 단장과 찍은 사진을 찾아서 띄어 놓았다. 또한 주 교수는 최근에 발간한 ‘주강망문집(朱江網文集)’과 ‘해내외음식회상록(海內外飮食回想錄)’ 등 2권씩을 우리 일행들에게 줬다. 미식가(美食家)로 알려진 朱 교수는 세계음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회상록에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미국과 일본, 중동 등 다양한 국가의 음식을 다루고 있다. 이 책 121페이지에는 ‘한국식록상(韓國食錄上)’이란 장(章)에서 완도국제학술회의를 끝내고 1992년 11월 21일에 서울 김성훈 중앙대 교수의 집을 방문했던 사실을 기록했다. 이 때 김 교수의 부인 박인아 사모가 차려준 19가지 음식 종류 등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다음은 朱 교수가 쓴 내용을 번역한 글이다.
“ 주인과 손님들 사이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완도회의 때의 긴장감과 피로감을 전부 잊게 했다. 다들 탁자에 들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김 교수님의 부인과 따님은 우리를 위해 특별한 정성을 다해 정갈한 요리를 준비했다. 김 교수의 부인은 성이 朴씨인데 만들어주신 가연의 독특함에 김 교수로부터 <박부인식> 요리로 불렀다. 이들 부부의 정이 얼마나 깊은 지 엿볼 수 있었다. 식단에 차려진 음식은 다음과 같다. 한국녹차와 인삼무침 오이조각무침, 죽순에 소고기와 왕새우를 넣은 요리, 고기볶음, 새우튀김, 소갈비구이 등.“ 이번 답사단의 가이드를 맡았던 김성일 청도대정여행사 사장이 번역을 해줬다.
우리 일행은 기자 이상으로 꼼꼼하게 기록한 朱 교수의 눈썰미에 감탄했다. 주강 교수와 아쉬운 작별을 고한 뒤 강도구에 있는 경강대반점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여장을 푼 뒤 호텔 내 식당에서 梁 국장이 베푼 만찬에 참여했다. 梁 국장은 풍요로운 도시 양주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강했다. 이날도 양주 특산품으로 만든 음식을 권했다. 특히 13억 중국 인민이 좋아하는 양주 볶음밥을 먹어보도록 권했다. 양주 볶음밥의 역사는 수양제가 양주를 순찰할 때 “밥을 볶을 때 기름과 달걀노른자가 어울려 금가루처럼 보이는 "쇄금반(碎金飯)"을 좋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유행했다는 설이다.
답사 다섯째에 접어들면서 태주 천태산 국청사를 향해 출발했다. 양주에서 태주까지 하루 종일 관광버스로 타고 가야하기 때문에 중간에 소주(蘇州) 한산사(寒山寺)를 잠깐 둘러보기로 했다. 김 단장이 당나라 시인 장계의 풍교야박(楓橋夜泊) 한 구절 씩 읊으면 답사단원 모두는 큰소리로 따라했다. 김 단장이 한 구절의 한자를 먼저 낭독한 뒤 한 문장씩 뜻을 해석하면서 詩를 음미했다. 특히 79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김 이사장의 기억력은 탁월한데다 언변도 뛰어난 탓에 듣는 이들로 하여금 많은 감동을 안겨줬다.
풍교야박(楓橋夜泊)
月落烏啼霜滿天 달은 지고 까마귀 울며 서리는 하늘에 가득한데
江楓漁火對愁眠 강가 단풍 사이로 고깃배의 불빛이 시름겨운 잠을 비치네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 저 멀리 한산사에서
夜半鐘聲到客船 한밤중에 종소리 나그네 뱃전까지 들려오네
장계의 풍교야박에 심취한 탓에 어느새 한산사에 다다랐다. 한산사의 입구는 극심한 교통체증을 빚었다. 도로가 좁은데다 밀려드는 관광차량 때문에 뒤엉켜 좀처럼 차들이 빠져나가지 못했다. 한산사는 장계(張繼)의 풍교야박(楓橋夜泊) 때문에 유명해졌다. 장계는 세 번 과거시험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뒤 이곳에 머물며 썼던 시가 바로 풍교야박이라는 것이다. 장계가 살던 시기는 안사의 난 때문에 나라가 혼란한데다 절망에 빠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쓸쓸한 심경을 담았던 탓에 후세들이 즐겨 읊는다고 한다. 게다가 천하제일의 불종(佛鐘)이 한번 울리면 수명이 10년 연장된다는 전설 때문에 한산사를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도 했다. 우리는 한십유종(寒拾遺踪)의 출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길 오른쪽 건물 벽면에는 당대의 유명한 시인들의 시(詩)들을 적어 놓았고 왼쪽에는 관광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장계의 시구에 나오는 풍교(楓橋)는 상당하(上塘河)와 고운하(古運河)가 합류하는 지점에 아치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량의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었다. 이곳 한산사를 유명하게 만든 또 다른 이유는 한산-습득의 전설로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기 때문이다. 한산과 습득의 전설 때문에 한산사는 ‘화합문화의 성지(聖地)로 부각됐다. 그렇다면 한산과 습득의 전설은 어떤 내용일까?.
습득과 한산은 당(唐) 태종의 정관(貞觀, 627~649)연간에 국청사에 살았던 인물이다. 이와 더불어 풍간(豊干)이라는 도인이 이곳에 살았다. 이들 세 성자(聖者)를 ’국청삼은(國淸三隱)‘이라고 불렀다. ’국청삼은‘의 像을 모신 곳이 삼현전이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따르면 풍간선사는 아미타불의 후신이요, 한산은 문수, 습득은 보현보살의 화현이라고 기록한데서 세 성자(聖者)로 부각됐다. 한산과 습득은 늘 어울려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으며 큰 소리로 웃으며 떠들고 미친 짓을 하면서도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불법(佛法)에 어긋남이 없이 오묘한 것들이었다고 한다. 특히 습득은 주지스님이 “너는 주어다 기른 아이인데 너는 본래 어디서 왔으며 너의 본래 성(姓)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두 손을 맞잡고 꼿꼿하게 서서 아무 말 안하는 모습(차수이립: 叉手而立)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선문(禪門)에서는 아직도 차수이립을 화두(話頭)로 삼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한산과 습득은 화합이선(和合二仙)이며 중국 민간에 전해져오는 ‘혼인과 화합을 이루어주는 신’으로 알려졌다.
답사단은 3시 40분 쯤 태주 천태산 국청사풍경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천태산에는 폭포수 위 허공에 거대한 자연석 대들보가 걸려 있는 석량(石梁) 풍경구 외에 적성산․화정․동백궁․양태선곡․용아협․한산호․천호 등 8개 풍경구가 자리를 잡고 있을 정도로 절경이 뛰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국청사는 중국 천태종의 본산이며 4대 사찰에 포함될 정도로 유명세를 갖고 있다. 다만 중국 사찰은 오후 4시면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전각의 문이 닫히기 때문에 늦게 도착하면 참배가 어렵다. 이 때문에 주차장에서 셔틀버스가 있는 곳까지 뛰었으며 국청사의 정문이 닫히기 직전에 가까스로 경내로 진입했다. 국청사는 지자(智者)대사가 직접 설계하고 그의 제자인 장안대사가 창건했다. 대부분의 중국 사찰 정문이 남향과 서향인데 비해 국청사는 동향(東向)으로 나 있는 것이 특이했다. 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데서 유래됐던 우화전(雨花殿)을 관람하고 나서 대웅보전으로 이동하는 순간, 대웅전의 문이 닫혔다. 이어 곳곳에 스님들이 관람시간이 끝났음을 알렸다. 국청사를 보기 위해 버스로 6시간을 이동해서 왔는데,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 아쉬웠다. 한 곳이라도 더 보기 위해 대웅전 오른쪽을 둘러봤다. 1400년간 한 자리에서 국청사를 지켜온 수매(隨梅)를 볼 수 있었다. 국청사가 창건될 때 심었던 이 매화나무는 중국불교가 위기를 겪을 때는 꽃이 피지 않고, 흥할 때는 흐드러지게 핀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隨梅를 등 뒤로 계단을 따라 관음전까지 올랐으나 관리하는 스님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고 제지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국청사의 면적은 7만㎡에 많은 전각들이 들어선 탓에 다소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국청사에서 주차장까지 걸어내려 오다가 수나라 때 지은 보탑(寶塔)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일명 ‘수탑(隨塔)’으로 불리 우는 이 탑의 높이는 59.3m에 6각 9층이고, 벽돌로 된 담에는 불상이 매우 정교하게 조각돼 있었다.
답사 여섯째 날 답사단의 일부가 국청사를 자세하게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을 덜어주기 위해 새벽 5시 20분에 모여서 다시 가기로 했다. 답사단이 투숙했던 천태빈관에서 국청사까지는 택시로 15분 거리에 있었다. 어제 건성으로 봤던 대웅보전에 들어가 부처님께 참배를 했다. 새벽에 隨梅를 다시 봤을 때 오랜 세월을 버텨 온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국청사 경내의 제일 윗자리에는 관음전과 중한천태종조사기념당(中韓天台宗祖師記念堂)이 있다. 한․중 천태종의 합작품인 조사당은 중앙에 천태종 개조 지자대사, 오른쪽에는 한국 천태종 개조 의천대각국사, 왼쪽에는 이를 중창한 상월원각대조사상이 모셔져 있다. 그러나 이른 아침인 탓에 조사당의 문은 굳게 닫혔다. 기념당 아래 계단으로 내려와 삼현전, 묘법당, 나한당, 삼경전, 가람전 등을 둘러봤다. 국청사 방문을 끝낸 일행은 주산시를 향해 출발했다. 영파를 지나 세계에서 두 번째 긴 다리인 항주만대교를 지나 주산시로 접어들었다. 토요일인 탓에 주산시 보타도를 가기 위한 차량의 행렬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예정 시간보다 40분 늦게 주산시(舟山市) 정해구(定海區) 해원로(海院路)에 있는 절강해양대학교에 도착했다. 섬을 매립해 최근에 대학캠퍼스를 조성한 탓에 질서정연하고 깨끗했다. 이곳은 김덕수 교수가 군산대학교에서 정년한 뒤 절강해양대학에서 초빙교수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구면(舊面)인 왕잉(王潁) 교수는 회의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는 중국의 대외경제 그랜드 플랜이자 국제무역질서 재편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이 고대의 해양실크로드와 연계되어 있음을 설명했다. 그는 한중관계를 복원하는 것은 과거 주산과 장보고, 고려 등과의 교류를 오늘날에 재현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단장은 30년 전에 손보기․김문경 교수와 함께 이곳에 왔을 때 손보기 교수가 보타도의 유물을 보고 백제시대와 닮았다는 말을 상기시켰다. 이에 왕잉 교수도 한국인과 자신은 형제와 같다는 느낌을 갖는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를 학교 식당으로 안내해 풍성한 오찬을 베풀었다. 정이 많고 활력이 넘치는 왕 교수는 늦은 점심을 먹는 일행에게 술과 음식을 자주 권했다.
점심을 끝낸 우리들은 주산에서 배를 타고 보타도로 가야하는 일정 때문에 서둘렀다. 가이드에 따르면 심청전에 등장하는 인당수가 전단강에 있으며 주산도에는 심(沈)씨들의 집성촌 심가문진(沈家門鎭)과 심가촌(심가촌), 심원(沈園) 등이 산재해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연유로 곡성군과 주산시 보타구는 오래전부터 자매결연(姉妹結緣)을 맺었다고 알려줬다. 그동안 심청전에 등장하는 인당수는 막연히 장산곶과 백령도 중간에 있는 걸로 알고 있었던 상황에서 혼란이 생겼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진나라 때 백제에서 보타(普陀)로 시집 온 효녀 심청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와 무역을 하던 거상 심국공(沈國公)이 앞을 못 본 부친의 길러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홍법사에 인신 시주(人身 施主)한 처녀를 데려와 부인을 삼았다고 한다. 이 처녀는 전남 곡성에 사는 봉사 원홍장(元洪莊)의 딸 원량(元良)이 결혼한 뒤 심청(沈淸)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다만 시간이 없어 심청 관련 유적은 보지 못했다.